은행 고객들이 보험창구에서 상담을 받고있다. 최근 은행은 보험을 팔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요즘 은행에 가면 잘못 들어선 게 아닌가 싶어 발걸음이 주춤거린다. 분명히 은행에 왔는데 커피 전문점이 있고 휴대전화기를 팔고 있다. 은행원과 예금 또는 대출 상담을 하다보면 어느덧 보험가입을 권유받는다.
별 일도 다 있다. 그러나 놀랄 필요가 없다. 은행이 바야흐로 변신 중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은행은 ‘본업’이었던 예금과 대출은 인터넷에 맡기고 ‘부업’을 본업처럼 할지도 모른다.
싼 이자로 예금을 받아 높은 이자로 대출해주고 그 차액(예대마진)으로 수익을 남기던 은행들이 ‘돈 장사는 한 물 갔다’고 선언한다. 대신 보험, 복권, 커피, 휴대전화 등 기존 은행 업무와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상품을 앞 다퉈 팔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남는 장사를 택한 것이다. 시중 은행장들이 “수수료 수입을 늘리라”고 독려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금을 덜 받으라’거나 ‘떼일 위험이 높은 대출을 줄이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
요즘 은행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있을까. 은행의 수익구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은행 25시
A은행의 김현태 대리(34)는 “보험 상품 실적을 올리라”는 지점장의 독촉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취급하기 시작한 보험 상품(7년 짜리 비과세 보험)의 판매실적이 바로 지점의 영업실적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B은행의 지점장은 본사로부터 “보험 실적을 연말 업적평가에 높은 비중으로 반영하겠다”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은행원들은 이래저래 스트레스다.
보험은 실제로 은행에 훌륭한 수익사업이 된다. 보험사가 개발한 상품을 은행에서 가입시키면 은행은 건당 3∼4%의 수수료를 일시불로 받는다. 7년간 보험 납부 서비스를 해주기 때문에 연간 0.5% 내외의 수수료를 챙기는 셈이다. 예금을 유치해 아무리 잘 굴려도 연간 0.5%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고작인 현 상황에 비하면 앉아서 남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전국적인 열풍이 불고 있는 로또복권을 파는 국민은행. 이 은행은 본점의 로또복권 사업부가 2%, 판매를 대행하는 지점은 5.5%의 수수료를 받는다.
2000원짜리 로또복권 한 장을 팔면 본사는 40원, 지점은 110원의 수익을 챙기는 것. 첫 발매된 지난해 12월 이후 이달 21일 현재까지 로또복권 판매액이 2조8714억원이므로 국민은행은 2000억원가량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국민은행은 또 인터넷으로 연결해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휴대전화를 LG텔레콤과 연계해 판다. 대당 28만∼38만원인 단말기를 팔면 5만원의 수수료가 떨어진다.
조흥 제일 외환은행 등은 최근 은행 안에 커피전문점을 열었거나 열 예정이다. 커피전문점을 즐겨 찾는 10∼30대를 끌어들인다는 마케팅 전략도 있지만 큰 임대수입도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다.
이달 말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에 15평 규모의 매장을 낼 예정인 스타벅스는 매출액의 12%를 임대료로 은행에 주기로 했다. 외환은행은 스타벅스가 매달 4000만∼5000만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계산하고 있어 연간 6000만∼7200만원의 소득을 기대할 수 있다. 같은 평수의 인근 상가 임대소득은 연간 2700만∼4000만원 정도다.
해외이민을 신청하는 사람이 느는 것도 은행은 반갑다. 이민전담센터를 두고 이주 대상국의 금융계좌를 개설해주거나 신용카드 발급을 주선하고, 한국에 남겨두는 예금과 부동산 등을 관리하면서 수수료를 챙기기 때문이다. 환전할 때 달러당 수수료는 일반적으로 12∼15원. 부동산을 관리해주면 월 임대료의 6∼9%를 수수료로 뗀다.
송금 수수료나 현금지급 수수료는 매년 비싸진다. 올 들어 인터넷뱅킹의 타행이체 수수료를 올린 은행은 경남 국민 대구 신한 외환 제일은행 등 6곳이다. 거래 은행이 아닌 은행에서 현금을 찾을 때 내는 수수료는 거의 모든 은행이 올렸다.
●저금리시대의 고금리 대출
직장인 이주희씨(28·여)는 얼마 전 월세를 얻기 위해 은행대출을 받으려 했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대출이 뭐 그리 어려우랴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한 은행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인터넷 대출 상담을 했다.
직장생활 4년차에 연봉 3000만원인 이씨가 1000만원을 신용대출하려고 보니 금리는 무려 연 10.25%. 마이너스 통장으로 대출할 경우 금리는 0.5%가 추가됐다. 그는 은행에서 대출 받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회사 신용금고에서 8%에 빌리기로 했다.
콜금리(시중 은행끼리 자금을 주고받을 때의 금리. 은행의 예금 및 대출 금리의 기준) 3.75% 시대, 예금 이자도 4%대(1년 만기 정기예금 기준)에 불과한 요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은행 대출도 손쉽게 이뤄져야 하지만 대출의 문턱은 그다지 낮지 않다.
담보를 내세우지 않으면 고액 연봉자라도 10%가 넘는 금리에 최대 5000만원까지밖에 대출받지 못한다. 만일 부동산을 담보로 내놓으면 금리는 6%대로 떨어진다. 대출액도 부동산 평가가격의 50%가량으로 늘어나지만 이것도 과거 90%에서 상당히 줄어든 것.
신용대출의 금리가 비싼 이유는 뭘까. 신용대출은 그야말로 신용만으로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은행은 고객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일정 비율의 돈(대손충당금)을 쌓아둔다. 신용대출의 대손충당금 비율은 0.75%(금융감독원 권장).
1000만원씩 100명에게, 총 10억원만 대출해줘도 이 은행에서는 750만원의 자금을 운용하지 못한다. 올 상반기 한 은행에서는 5000억원의 수익을 올리고도 카드와 대출 등의 대손충당금 6000억원 때문에 적자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꺼리는 이유다.
은행은 고객의 예금도 달갑지 않다. 자금을 굴려 수익을 남기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갑자기 수억원대의 자금이 예금됐다고 하자. 고객에게 4%를 주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당일 자금시장에서 3개월짜리 기업어음(CP)이나 3년 만기 국채를 4.5%에 살 수 있다. 그래도 은행은 0.5%의 이익밖에 얻지 못한다. 때로 예금 규모가 수십억원대로 커지면 예금 이자가 4.4%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은행은 0.1∼0.2%만 남긴다.
운이 나쁘면 이렇게 자금을 굴리지도 못한다. 들어온 돈을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에 콜금리로 다른 은행에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 최근 콜금리는 3.75%, 고객에게 주는 이자는 4%이므로 자금을 굴리고도 0.25%의 손해를 감수해야한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은행들은 힘든 장사는 안하고 싶어 한다. 은행들이 비금융 상품 개발에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시중은행 간부는 “은행들이 ‘돈 놓고 돈 먹는’ 장사에서 벗어나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면서도 “서비스 개발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금융상품을 보다 다양하게 개발해 시중 자금을 순환시키는 금융 본래의 업무에 충실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