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무서운 태풍 매미가 몰아치던 추석 연휴, 부산 광안리 수녀원의 우리도 밤잠을 설쳤다.
어떤 이는 마치 ‘최후의 심판’을 미리 경험한 것 같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그동안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용서를 빌며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다고도 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장독대의 항아리와 유리창이 깨지고 오래된 나무들이 쓰러지고 밤부터 계속된 정전으로 불편을 겪었지만 집과 가족과 생업을 잃은 다른 이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고립되었다가 겨우 구조된 강원도의 어느 주부가 “사람을 처음 보았다”며 서럽게 우는 모습이 신문에 실린 걸 보고 나도 눈물이 났다. 우리도 급한 대로 몇 명의 수녀들이 옷가지와 생필품을 싣고 도움을 요청하는 거제도의 어느 교회에 다녀왔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 없다. 태풍으로 큰 피해를 본 장소마다 여기저기서 나름대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는 있지만 웬만한 노력으로는 부족할 듯하다. 큰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늘 마음이 아프고 때로는 분노와 원망으로 극단적인 푸념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슬픔을 당한 내 이웃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사랑하면서 당장의 고난을 극복하도록 함께 마음을 모으는 지혜일 것이다.
태풍 매미는 떠나면서 우리에게 포효하는 음성으로 사랑을 재촉했다. 나만 생각하는 안일한 태도와 이기심을 버리고 평소에도 늘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신과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지니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겸손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이런 때일수록 강한 인내와 용기, 내 나라를 걱정하는 순결한 애국심이 필요하다. 태풍 후의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늘빛 마음으로 기도해 보자.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가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가는 노력으로 ‘나부터 먼저’ 참사랑을 배우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탐욕을 버리는 겸손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이해인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