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기자의 눈]김상수/이승엽 홈런 ‘民心의 통합’

입력 | 2003-09-25 18:31:00


“기아가 이겨야죠. 그러나 그보다는 이승엽이 홈런을 치면 더 좋겠어요.”

24일 프로야구 기아-삼성전이 열린 광주구장에서 만난 한 야구팬은 이렇게 말했다. 기아의 근거지가 광주인 만큼 광주 팬이 기아의 승리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이승엽 응원’은 다소 의외였다.

기아는 전신인 해태 시절부터 삼성과 숙명의 라이벌. 각각 호남과 영남을 대표하는 프로야구팀인 데다 라이벌 의식까지 더해 소문난 앙숙임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래서 이승엽이 기아전에서 홈런 못 치기를 바라는 게 광주 팬의 마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막상 경기가 시작돼 이승엽이 세 차례 연속 볼넷으로 걸어 나가자 광주 팬들은 기아 투수를 향해 “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정면승부를 피했다는 나무람이었다.

이승엽의 홈런을 기다리는 것은 광주 팬뿐만이 아니다. 전국의 팬들이 시원한 ‘한 방’을 기다리고 있다. ‘형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저희가 응원하겠습니다.’(충북 충주성심학교 청각장애인 야구단) ‘32억 아시아인에게 이름을 날리기 바라요.’(민지수) ‘홈런 소식에 너무 좋아 차 안에서 소리를 질렀어요.’(조흥진)…. 삼성 구단과 이승엽의 홈페이지엔 팬들이 보낸 성원의 글이 넘쳐난다.

야구를 모르는 이들도 이승엽 얘기만 나오면 귀를 세운다. 그의 홈런은 이제 야구팬뿐 아니라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기다릴까. 한국야구위원회 이상국 사무총장은 “사회의 모든 면이 암울한 마당에 이승엽이 기록 달성을 앞두고 있어 국민이 거기에 기대를 걸고 위안을 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거리에 청년실업자가 넘쳐날 만큼 경제는 엉망이고, 민생을 살펴야 할 정치인들은 싸움으로 나날을 보내고, 생활고를 못 이겨 부모가 자식들과 함께 목숨을 끊는가 하면, 원칙 대신 편법이 판치는 사회. “이 나라가 싫다”며 외국으로 떠나는 이민대열이 줄을 잇는 마당이다. 이처럼 어디 한군데 마음 붙일 곳 없는 터에 이승엽의 시원한 홈런 소식은 답답한 일상과 고단한 삶 속에서 한 가닥 즐거움을 선사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앞으로 2개만 더 때리면 이승엽은 아시아 신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그 기록이 달성되도록 모두 성원하자. 상대팀 투수들은 “희생양이 되기 싫다”며 피할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가리고 팬들은 이승엽이 헛스윙을 해도 힘찬 박수로 힘을 보태주자.

이승엽의 홈런은 이제 그 자신이나 삼성구단의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의 것이다.

김상수 스포츠레저부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