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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홍찬식칼럼]미테랑과 노무현

입력 | 2003-09-26 18:00:00


문화계에도 ‘코드 논쟁’이 뜨겁다. 정부 소속 문화예술단체장에 진보계열 인사들이 잇따라 임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국악원장 자리에 특정 세력의 인사가 임명된 것을 놓고 어느 국악인이 던진 말이 의미심장하다. “국악인은 전통음악이나 잘 계승 발전시키고 있으면 됐지, 개혁 성향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평생 국악 이외에는 모르고 살아 온 이 분의 한마디가 현란한 어휘를 구사하는 어느 비평가보다도 핵심을 찌른다. 시 쓰고 클래식 연주하는 문화의 세계에 ‘개혁 코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실망스러운 문화계 ‘코드 인사’▼

그렇다면 문화계는 개혁이 전혀 필요 없는 곳일까. 그렇지는 않다. 문화 자체는 개혁 대상이 아니지만 문화와 관련된 기관과 단체에는 인적쇄신이 요구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문화계에도 정치색을 띤 인사가 적지 않았고 이들이 단체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권력과 ‘거래’를 하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했던 사례들이 있었다.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편파 인사’ 논란에 대해 이런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선 결과를 놓고 보면 실망스럽다. 거의 매번 진보 쪽 인사를 임명하는 것이 과거 정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얼굴은 바뀌었으나 자기 편 사람들로 채운 편파적인 구성 방식은 똑같다. 자신들이 맹렬히 비난했던 일을 위치가 바뀌자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셈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문화와 문화 발전에서 조직이나 단체는 별 의미가 없다. 미국은 우리의 문화부 같은 정부기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엄연히 문화선진국이다. 설사 문예진흥원 같은 정부 산하 문화단체들이 몽땅 없어지더라도 우리 문화는 나름대로 굴러갈 것이다. 문화란 원래 개인이 하는 일이다.

그래도 새 정부의 문화정책은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바야흐로 문화생활 같은 ‘삶의 질’이 중시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문화발전을 위해선 지도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래서 우리는 ‘문화대통령’을 갈망하게 된다.

문화대통령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 중에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있다. 그가 사회당 출신이었고 집권 초기 프랑스의 경제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은 요즘 우리 사정과 비슷하다. 그가 집권하자마자 가장 열의를 보인 일은 ‘그랑 프로제’라는 문화 인프라 구축 계획이었다. 오늘날 파리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오르세 미술관과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건설, 루브르 박물관 확장사업 등이 그의 업적이다.

그가 시작한 사업들은 좌파 지지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극장이나 미술관 같은 ‘사치스러운 공간’을 만드는 대신 가난한 서민의 주택 확충에나 신경 쓰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그래도 미테랑 전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테랑 전 대통령은 관련 사업의 예산과 실행을 직접 관장했으며 집무실에는 극장의 건축 모형들을 가져다 놓고 어느 것을 고를까 고민을 거듭했다. 파리 시내의 오래된 건물들과 새로 짓는 극장이 미학적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기 위해 대통령 전용 헬기를 타고 현장을 시찰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문화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부럽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화에 대한 그의 철학이다. 그것은 문화의 대중화로 요약될 수 있다. 3000석 규모의 대형 극장인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이 세워진 후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오페라 공연이 서민층에 싼값의 관람료로 제공됐던 것이 상징적인 예다.

▼국민 못 보는 문화정책 ▼

노무현 대통령이 문화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가 미테랑 전 대통령에게 배워야 할 게 있다면 문화의 초점을 문화 소비자, 즉 국민에게 맞추었던 정책 방향이다. 집권 당시에는 지지세력에게서도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정책은 좌파 이념에 더 근접해 있었다. 미테랑 전 대통령에 비교한다면 이 장관의 문화정책은 연극인 100인 선언 등 ‘코드’ 파문에서 나타났듯이 문화생산자단체의 인적구성 등 주변적인 데 머물러 있다. 시야가 좁아도 너무 좁지 않은가. 만약 노 대통령이 문화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제 지엽적인 것 말고 문화의 ‘큰 그림’을 내놓으라고 이 장관에게 주문해야 할 것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