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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이태동/문화계 '껍데기'는 가라

입력 | 2003-09-26 18:03:00


“나는 고뇌하는 모습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기에.”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이렇게 불멸의 고전이 된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개인적 자유(polar privacy)가 있는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과 싸우며 고뇌의 진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는 ‘광장’의 집단과 더불어 이뤄지지만, 창작 예술은 자기와의 치열한 대결을 벌이는 ‘밀실’에서 이뤄진다.

▼ 예술가 명예는 창작魂서 나올 뿐 ▼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는 데에 영향을 준 톨스토이의 ‘하지 무라트’는 말할 것도 없고 링컨에게 노예해방의 불씨를 제공했다는 스토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도 ‘광장’이 아닌 ‘자기만의 방’에서 절망과 희열이 교차하는 고통 속에 만들어졌다. 예술가들은 자기와의 싸움의 결과로 예술을 창조하기 때문에 위엄을 지킬 수 있고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만일 어느 예술가가 세속적인 명예를 얻기 위해 ‘자기만의 방’에서 걸어 나와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적인 일에 매달린다면 더 이상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없게 되고 혼(魂)을 잃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그와 코드가 맞는 영화감독 이창동씨가 문화관광부 장관의 자리에 오르고 소설가 현기영씨와 시인 강형철씨가 각각 문예진흥원 원장과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뒤이어 교체되는 문화부 산하 예술 관련 기관 단체장 자리도 모두 민예총 인사들로 채우게 됐다. 이로 인해 그들과 이념적으로 반대편에 선 문화인들은 ‘이창동 사단’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비난하며 시위까지 벌이게 되니 문화계는 지금 심각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해 예술원 원장을 포함한 연극계의 중심인물들이 문화부 장관의 ‘편파적 인사’에 대해 저항의 목소리를 높여야 했던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 이들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영화감독은 예술가로서만 만족하지 못했을까. 만일 이들이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공직을 맡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면 대부분의 예술인들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행정직은 행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 맡아 객관적으로 사심 없이 일하면 된다. 진보적인 인사들은 과거 문화행정가들을 비판하지만, 그들은 예술의 전당을 짓고 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렀으며 예술종합학교를 세우는 등 그 나름의 업적을 남기면서 균형 있는 행정력을 보였다.

우리 문화계가 이렇게 이념 논쟁 등으로 권력싸움을 하고 있으니 예술 활동이 침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쓴 작품을 읽어 보라. 세계문학의 방향도 읽을 수 없고 비전도 없으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유아독존에 빠져 개성을 찾아볼 수도 없다.

문화계의 상층부가 이렇게 위엄을 잃고 창조행위와는 거리가 먼 정치 권력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문화계 하층 주변에서 벌여 온 ‘감투 싸움’으로 인한 문단의 황폐화를 탓할 수도 없다. 문단의 경우, 단체장 선거철이 아니라도 조금만 옆으로 눈을 돌리면 일부 세력들이 허울만 좋은 껍데기 문화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격이 의심스러운 문인들을 양산하며 정치판을 벌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권력 놓고 추잡한 싸움 한심 ▼

선진국에서 예술가의 명예는 작품으로 지키는 것이지 결코 선거판에서 얻은 표로 결정되지 않는다. 카뮈는 그의 ‘비망록’에서 “정치는 이상도 위대함도 없는 자들에 의해 이뤄지지만 정작 자기 자신 속에 위대함을 지닌 자들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 내부에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라고 적고 있다.

정부와 문화단체를 맡고 있는 이들은 더 이상 이념논쟁과 세력다툼으로 순수한 예술가들의 권위를 손상시키며 그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몇몇 문화인들이 창조적인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서푼짜리 명예를 얻기 위해 그들이 속한 문화 환경을 계속 더럽힌다면, 우리의 예술 수준은 계속 지구촌 변두리의 그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는 시인 신동엽의 말이 다시금 기억에 새롭다.

이태동 서강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