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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라이프]'전통 고수' 백호이발관

입력 | 2003-09-28 18:16:00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익선동 ‘백호이발관’에서 이발사 윤만철씨(오른쪽)와 서진호씨가 익숙한 가위놀림으로 손님들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변영욱기자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익선동 낙원상가 뒤의 이른바 ‘칼국수 골목’.

빈대떡 부치는 냄새가 고소한 선술집 사이에 페인트가 벗겨진 이발소 나무간판이 슬래브 처마 밑에 옴팡지게 버티고 있었다. ‘배코(빡빡머리)’를 잘 친다고 이름도 ‘백호’라는 이 이발관에 들어서자 찐득한 포마드 냄새와 수건 삶는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사각거리는 가위소리가 들렸다.

낡은 TV에 비키니여자 달력, 그리고 호랑이 민화와 산수 동양화. 박석우의 ‘일상 속의 미술-이발소그림’에 따르면 이발소 그림은 1960, 70년대 평생 미술관 한번 가기 힘들었던 우리 아버지들에게 복제품으로나마 미술감상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발사 윤만철씨(61)는 그림들을 가리키며 “우리 가게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말했다. 그림은 물론 TV며 라디오 등 웬만한 물품들은 이 집 단골들이 청계천과 동대문에서 구했다며 하나씩 가져다 준 것이다. 윤씨는 “편안히 친구처럼 대하다 보니 손님들도 제 집처럼 느끼는 모양”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꽤 늦은 시간인데도 손님들로 왁자지껄했다. 20년 단골이라는 기길춘씨(62)는 “오전 6시 반에 와도 손님이 기다리고 있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호텔보다 낫다며 찾아오는 노신사, 왕년의 유명 연예인, 멀리 인천에서까지 오는 단골들….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이발사들은 점심을 굶는 일이 허다하다.

여기서 일한 지 5년 됐다는 서진호씨(57)는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서씨는 “손님들이 여기서 잘라야 제대로 자른 것 같다고 하면 배고픈 것도 잊는다”며 “김밥이나 부침개를 싸들고 오는 단골들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발사들을 사람 좋은 줄 알고 함부로 대했다간 문전박대를 당하기 십상. 백호이발관은 꼭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 서씨는 “거들먹거리거나 다른 손님에게 함부로 하면 당장 쫓아낸다”면서 “잘났건 못났건, 돈이 많건 가난하건 모두 똑같은 손님”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오래된 모양새만큼 이발방식도 예전 그대로를 고수한다는 점. 머리 층의 형태가 잘 드러나게 고구마가루인 전분을 뿌리고 뜨거운 수건을 얼굴에 올렸다가 두꺼운 칼로 면도를 해주고 귀와 눈썹까지 손질해준다. 게다가 프랑스의 한 회사 제품에서 유래한 이름인 ‘바리캉(이발기계)’은 오랜 단골들이 ‘후라이(사기)’라고 싫어해 웬만한 손질은 가위로 해결한다.

백호이발관의 해묵은 고집은 이제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 더 유명하다. 관광안내 책자에 실린 것도 아닌데 일본, 중국손님은 물론 배낭을 짊어진 서양인도 곧잘 찾아온다. 딴 거야 손짓발짓으로 뜻이 통한다지만 원하는 머리 스타일은 어떻게 알아듣는지 궁금해 하니 윤씨가 대뜸 한마디했다.

“깍쇠(이발사)만 반평생이여. 척 보면 알아.”

정양환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