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갚을 능력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한 아파트. 서울지방법원 K집행관(55)과 직원 등 3명이 한 조가 돼 채무자 A씨(35)의 집을 찾았다. 이 채무자가 진 빚은 카드빚으로 액수는 1300만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채무자는 집행관이 냉장고며 TV에 빨간색 압류딱지를 붙이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이날 모든 가재도구가 압류됐지만 원칙에 따라 최저가로 감정한 결과 다 합쳐야 1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감정료 6만원을 포함한 집행비용 20만원과 이자를 갚고 나면 원금을 갚을 수 있는 금액은 고작 60만∼70만원이다.
K집행관은 A씨의 집 외에도 오전에만 두 곳의 카드 채무자 집에 더 들렀지만 아무도 없어 그냥 돌아섰다. 그는 “그래도 오늘은 칼 들고 덤비는 사람 없이 끝나서 다행”이라며 “압류딱지 다 붙여봐야 100만원도 안 나오는 집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불경기로 재산압류 및 강제경매가 급증하고 있다. 97년 외환위기와 더불어 급증했다가 점차 줄어들었던 재산압류가 지난해부터 다시 늘어나고 있는 것. 올해 8월 말 현재 압류 집행 건수가 이미 지난해 전체 수준에 육박하는 6374건.
집행관들이 전하는 채무자들의 가장 큰 변화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 예전에는 30% 정도의 채무자들이 돈을 갚겠다고 했으며 당일은 아니더라도 변제가 이뤄졌는데 요즘엔 그야말로 ‘나 죽여라’는 식의 채무자들이 많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변제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진 상태. 사채조달을 통한 ‘돌려막기’ 등 더 이상 돈을 융통할 곳이 없을 정도로 개인 경제가 악화돼 있다는 증거라고 집행관들은 지적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채무자들의 행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시너를 뿌린 뒤 프로판가스통을 들고 나오거나,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다.
K집행관은 “집은 빼앗겨도 자신이 소유한 옷장 안의 코트 하나 안 내놓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며 며칠 전 채무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피멍이 든 왼쪽 엄지손가락을 문질렀다.
카드빚 때문에 재산을 압류당하는 사람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도 근래 들어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서울지법의 한 집행관은 “예전에는 카드빚에 의한 압류가 10∼20%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난해부터 카드빚 압류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청년실업’의 후유증으로 20대 초중반의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면서 압류할 물품조차 없는 경우도 태반이다. 엄밀히 말해 이들의 재산은 부모 것이기 때문이다.
집행관 사무실에서 만난 다른 집행관은 “그나마 폭력적으로 나오면 마음은 편하다”며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휠체어 탄 사람을 끌어내거나, 고의로 병원에 계신 노모를 데려다 놓는 채무자를 상대했을 때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