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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포커스]'셜록 홈즈' 전집 번역해 붐 일으킨 정태원

입력 | 2003-09-30 18:06:00

‘셜록 홈스 전집’ 번역을 통해 국내에 셜록 홈스를 부활시킨 정태원씨가 셜록 홈스와 그의 친구 윗슨 박사의 조각상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정씨는 쉰 살을 앞둔 나이답지 않게 동안을 유지하는 비결이 기수련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원대연기자


우리가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실체를 몰랐던 ‘인물’이 지난해 국내에 부활했다. 코난 도일 원작 추리소설의 주인공으로, 명탐정의 대명사인 셜록 홈스. 냉철한 분석력과 강인한 의지의 인간형으로만 알려진 홈스는, 실은 모르핀 중독자에 여성과의 혼인을 혐오하는 캐릭터다.

지난해 ‘황금가지’와 ‘시간과 공간사’ 등에서 잇달아 출간된 셜록 홈스 전집은 국내 출판계에서 원전 번역과 미스터리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홈스 전집은 괴도 뤼팽 전집, 빨강머리 앤 전집 등의 원전 번역 바람을 낳았고, 1000권으로 기획된 ‘동서 미스터리 북스’ 전집 출간 등 미스터리 돌풍을 낳기도 했다.

정태원(鄭泰原·49)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는 그 홈스 부활의 영매(靈媒)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번역한 ‘시간과 공간사’ 전집(전 8권)은 첫 발간에선 ‘황금가지’ 판보다 늦었지만 완간은 더 빨랐다. 준비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1992년부터 이를 기획했고, 많은 출판사에서 “누가 어른이 돼서까지 셜록 홈스를 읽겠느냐”고 고개를 젓는 동안 혼자서 이미 4권 분량을 번역해 놓을 만큼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

“외국에서는 원전도 판별로 다양하고, 셜로키언(Shelockian)이니 홈지언(Homesian)이니 하는 홈스 연구자가 수두룩합니다. 이웃 일본만 해도 홈스 클럽이 400여개나 됩니다. 국내에서는 이제 시작인 셈이죠.”

그가 그처럼 홈스에 매달린 것은 그 상징성과 흡입력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탐정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극히 단편적인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라는 자극을 주고 싶었던 것.

“그동안 국내에서 홈스가 아동용 번역판의 주인공에만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실 추리소설은 삶의 여유가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지적인 오락이니까요.”

그는 우리의 민주화와 홈스의 재등장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추리소설은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 꽃피고, 공산주의 국가나 무솔리니 시절의 이탈리아 같은 파시즘 국가에서는 논리적 국민이 많아지는 것을 싫어해 추리소설을 금했다는 역사적 실례와 함께.

이 점에서 그는 최근의 ‘미스터리 붐’은 한국이 압축적 근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놓쳤던 교양교육을 뒤늦게 받는 것이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홈스는 가설과 검증, 관찰과 실험으로 대변되는 근대 경험과학적 사고의 대중 전도사이기도 했다.

“우리는 홈스에 매료되면서 점차 그의 사고방식을 따라하게 됩니다. 홈스는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비논리적 타성과 불합리한 미신에 젖어 있던 독자들의 두뇌까지 근대적 사고체계로 훈련시키는 것이지요.”

정씨는 1990년대 이후 추리문학계의 ‘보이지 않는 손’ 노릇을 톡톡히 해 왔다. 고려원 미스터리 전집, 한길사 미스터리 전집, 시그마북스 미스터리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직접 번역한 추리소설만도 70여권이 된다.

그는 문학 전공자나 번역 전문가가 아니다. 아버지(정우택 영화미술감독)의 영향으로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자유극단’ 무대감독으로 활약하다가 광고회사 CF감독으로 일했다. 1986년 아시아경기 때 잠실 주경기장에서 상영된 ‘서울’이라는 15분짜리 영상홍보물이 그의 작품이다.

그런 그가 국내 추리문학계의 한복판에 서게 된 것은 그가 국내 최고의 추리소설 애호가였기 때문인 듯하다. 경기 과천시 자택은 영어와 일어로 된 추리소설 원서로 가득하다. 1만3000여권이나 된다는 그 책들은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30여년 동안 모은 것들.

“괴도 뤼팽이 등장하는 ‘기암성’을 읽고 추리소설에 흠뻑 빠졌어요. 당시에는 추리소설이 드물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헌책방을 찾아다녔고 중학생 때부터는 일어와 영어로 된 원서를 읽기 시작했죠.”

해외연수나 출장 때면 그는 범인 추적을 위해 뒷골목을 뒤지는 탐정처럼 추리소설 희귀본 수배에 나섰다. 부인이 “추리소설이야말로 내 유일한 연적”이라며 쓴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정씨의 목표는 자신이 수집한 작품 중 최고 걸작을 가려 뽑은 ‘정태원 선집’을 내는 것이다.

“저는 추리문학이야말로 미래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세요. 추리기법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은 없어요. 독자들은 이제 더 이상 우연의 연속이나 논리적 비약으로 끝나는 것을 참아낼 수 없게 될 테니까요.”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논리적 게임’에 심취한 그가 최근에는 기(氣)와 영혼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는 점이다. 3년 전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그는 기자의 몸에 기를 불어넣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가 하면, 기자의 친척 중 요절한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맞히기도 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기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홈스의 작가 코난 도일도 말년에는 심령학에 심취해 세계심령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셜록 홈스의 인세수입 20만파운드도 심령학 연구에 투자했고요. 논리적 세계의 궁극은 결국 초월적 세계와 만나게 돼 있습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정태원씨는 ▼

―1954년 서울 출생

―1974년 자유극단 입단

―1981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1983년 광고회사 오리콤 입사, CF 감독으로 활약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공식 홍보물 ‘서울’ 제작 발표

―1987년 영화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 조감독

―이후 고려원 미스터리, 한길 미스터리, 시그마북스 등 수백권의 추리소설 전집 기획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셜록 홈스 전집’(전 8권) 외에 트리베니언의 ‘메인’과 리처드 닐리의 ‘월터 신드롬’ 등 70여권을 직접 번역했다. 부인 김미희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