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감정과 국가이익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니 대개의 경우 불일치한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달된 나라라도 일반 대중은 책임지는 위치에 있지 않은 관계로 감성적으로 판단하는 속성을 지닌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국민감정과 국가이익의 이격도(離隔度)를 축소시켜 줄 뿐이다.
▼ 지도자는 매맞을 각오로 결단을 ▼
그다지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기에 가족의 생계와 앞날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 이가 있다. 그런 사람에게 자식들이 “아버지, 그렇게 살지 말고 때려치워”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그는 사표를 낼 수 없다. “내 비록 오늘은 이렇게 살지만, 내 자식 세대에는 반드시 한을 풀리라.” 이를 악물고 박봉으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공통된 정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난 번 대선은 감정의 승리였다. “아버지, 때려치워” 하던 자식이 가장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가정을 책임져 보니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 지난 7개월간 노무현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갈지(之)자’ 행보를 보이며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이처럼 국정이 감정에 휘둘릴 때, 혼란과 위기는 필연적이다. 이것이 바로 중우(衆愚)정치의 폐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열기가 식지 않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일본 외교관이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기에 저녁을 같이 했다.
“독일통일의 주역 겐셔의 회고에 의하면 말이네, 그가 통일작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워싱턴의 반응이었다네.” 그는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한국의 현실을 우려하고 있음을 이내 알 수 있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정상회담 이후의 한국사회의 열기를, 본질은 망각한 채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euphoria)라고 진단하고 있었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8년간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서독의 통일외교를 진두지휘한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미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동분서주했다. 미국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자율적 공간을 끊임없이 넓혀 나갔고, 소련을 포용하면서도 할 말은 했다. 그의 이런 외교능력이 최대의 시련에 처한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였다.
소련은 통일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미국은 당연히 NATO의 일원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겐셔는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통일독일이 NATO에 잔류하되 구동독 지역에는 NATO군을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절묘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를 기초로 1990년 9월 이른바 ‘2+4’협정을 마무리 지으면서 통일에 결정적인 국제환경을 조성했다.
이런 천하의 겐셔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미국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워싱턴의 반응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러한 ‘처절한’ 노력이 있었기에 서독은 영국과 프랑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일독일은 어제의 서독이 아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공격을 앞장서서 반대한 나라가 독일이다. 겐셔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의 그러한 정책을 내놓고 지지했다. 분단 상황이었다면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처럼 민족자주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고도의 전략과 지혜, 그리고 인내력이 요구된다.
▼ ‘냉정한 외교’ 獨 겐셔 본받을만 ▼
지금 우리 사회는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 또다시 핵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국민감정을 생각하면 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국익을 생각하면 보내야 한다. 이처럼 국민감정이 국가이익과 상충될 때, 진정한 지도자는 대중에게 뭇매를 맞을 각오를 하고 국가이익이 명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개선되는 미래상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행위야말로 포퓰리즘의 극복이며, 역사에 대한 지도자의 책무다. 우리는 언제쯤 그런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