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보다 ‘동성간 우정’에 초점
‘오후’에는 ‘순정만화’ 하면 떠오르는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는 거의 없다. 평범한 여성에게 멋진 애인이 생긴다는 ‘백마 탄 왕자’의 전설이나 삼각관계로 인한 아픔도 없다.
그 대신 단행본으로 발간된 ‘폐쇄자’(만화가 유시진)나 ‘네 멋대로 해라’(나예리)처럼 동성간의 우정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만화잡지 `오후`에 연재중인 작품들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20대 여성들의 쿨(Cool)함이 반영되어 있다. 만화속 남성들은 실제 여성 독자들이 드러내기 꺼리는 사랑이나 우정에 대한 욕망도 투영되어 있다는 분석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시진의 `온`, 한승희의 `웰컴 투 리오`, 나예리의 `달에서 온 소년`, 송채성의 `미스터 레인보우`. 그림제공 시공사
‘오후’에 수록된 ‘HerShe’(이빈)는 고교부터 대학까지 서로 오해만 계속해온 두 여자의 이야기다. ‘온’(유시진)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친구가 되려고 끈질기게 애쓰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런 관계는 ‘동성애’로 흐르기도 한다. 특히 ‘오후’의 작가군 중 청일점인 송채성의 ‘미스터 레인보우’는 남성 동성애를 그렸다. 송씨는 “‘여성들의 판타지’의 대상이 아닌 남성들의 솔직한 모습과 고민을 담았다”며 “요즘 20대 여성들은 수용의 폭이 넓고 현실적이라서 이런 내용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차이를 이해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정은 ‘오후’ 팀장은 “20대 여성 독자들은 자기 정서를 탐구하는 장치로서 지금까지 많이 본 남녀관계보다 동성관계라는 새 구도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0대 여성의 ‘쿨(Cool)’함이란?
‘오후’에서 드러나는 ‘쿨’한 여성들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랑에도 호들갑을 떨지 않으며 현실을 담담하게 볼 뿐이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마담 베리의 살롱’(권교정)의 주인공 ‘에필’은 남성의 세계에 무표정하고 자연스럽게 침투한다. 아무리 황당한 일에도 땀만 한 방울 흘릴 뿐,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 20대 여성 독자의 호평을 받고 있다. ‘사랑해야 하는 딸들’(요시나기 후미)은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을 조명하나, 정작 주인공 유키코는 주변인들을 지켜볼 뿐이다.
이런 여성상은 이미 국내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이빈의 ‘크레이지 러브 스토리’나 ‘클램프’의 ‘X’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최근 발간된 단행본 ‘어느 특별했던 하루’(한혜연)는 캐릭터를 지나치게 미화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현실을 쿨하게 보는 요즘 여성들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지룡씨도 “일본에서도 경기 침체와 여성의 낮은 지위로 인해 독자들이 판타지에서 벗어나 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순정만화에서 주인공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사라졌다”고 밝혔다.
매년 독자들이 수상자를 선정하는 ‘독자만화대상 준비모임’의 조영희 대표는 “80년대 만화는 작가가 먼저 울어서 독자를 울렸으나 최근에는 주인공의 현실을 차분하고 건조하게 보여주는 기법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산다”고 말했다.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오후’의 작품들은 여성 캐릭터는 ‘쿨’하게 그리는 반면 남성 캐릭터는 여성들이 드러내기 꺼리는 정신적 상처나 인간관계에의 욕망을 투영시켜 그린다”고 분석했다.
조경복기자 kath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