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안에선 펄펄 나는 배우 이문식은 사진기자의 카메라 앞에 서자 한참을 어색해 했다. 그래도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사진 기자의 말에 세상이 밝아지는 환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인터뷰 중에도 출산을 앞둔 아내를 걱정하던 그는 6일 드디어 아빠가 됐다. 김미옥기자
《17일 개봉하는 영화 ‘황산벌’에서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백제군의 마지막 생존자 ‘거시기’ 역을 맡은 배우 이문식(37). ‘거시기’는 시대의 거센 격랑이 몰아쳐도 다시 일어서는 민초(民草)의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배역으로 엔딩 장면을 장식한다. 2000년대 들어 충무로에서 감초 연기의 대명사처럼 손꼽히는 이문식은 이 영화를 통해 만년 조역에서 주역 급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사실 눈 밝은 관객들에게 배우 이문식의 존재가 낯설지는 않다. 연극배우로 내공을 쌓은 그는 영화 ‘공공의 적’ ‘달마야 놀자’ ‘오! 브라더스’ 등과 TV드라마 ‘다모’에서 개성적 연기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주연만큼 주목받는 ‘조연 스타’ 이문식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말한다.》
○‘나 같은 놈이 이름 냄겨서 뭐더거소이, 그냥 거시기라고 알아두쇼.’
영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거시기’는 백제의 이름 없는 한 병사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외모가 거시기해서 그런가? ‘거시기’ 역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맡은 역할은 3류 인생이 많았다. 열심히 살긴 하는데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사람, 그러면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 ‘간첩 리철진’에서 내용 있는 대사를 처음 해봤는데 함께 개봉한 ‘매트릭스’에 눌려 영화가 생각만큼 빛을 못 봤다. 한동안 쉬다 다시 오디션을 찾아다녔다. ‘달마야 놀자’에서 호평 받은 이후 배역 걱정 안할 정도로 출연제의가 이어졌다.
주연에 대한 욕심은? 잘 모르겠다. 주연 조연의 구분에 그렇게 의미를 두진 않는다. 평생 연기할 거면 언젠가 한번은 주연도 하지 않을까.
좋은 역이든 나쁜 역이든 중요치 않다. 어차피 모든 역은 배우가 만들기 나름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도 앞으로 악역을 맡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악역이지만 미워할 수만 없는 그런 역을.
○연봉 200만원에서 ‘스타급 조역’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평탄하지 않아서 남들이 겪지 않은 일도 많이 겪어 봤다. 이런 게 배우로서 연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연극할 때는 1년 수입 200여 만 원, 단칸방에서 극빈자 생활을 했다. 처음 영화 촬영할 때도 서러움이 많았다. 화장실에 갔다가 ‘대기 안하고 어디 갔다 왔느냐’고 나이어린 스태프에게 혼난 적도 있다. 지금은 인터넷에 팬 카페도 생기고, 솔직히 수입이나 대우 면에서 많이 나아졌다. 무엇보다 촬영 후 모니터를 통해 내 연기를 확인할 수 있어 좋다.
가난한 집의 11대 종손인 그는 ‘탤런트 되는 과’라는 말을 듣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방송사 탤런트 시험을 보았으나 연거푸 떨어졌다. 차인표랑 같이 시험 봐서 3차까지 간 것이 최고 기록이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 두 번인데…조연 패밀리의 고민
사실 조연으로서 한정된 역만 반복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오! 브라더스’에서 악랄한 경찰 역에 욕심을 냈다. 감독은 반신반의했지만 나중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아내도 늘 얘기한다. 당신이 무슨 스타냐, 그냥 배우지. 비슷한 역할만 하려면, 차라리 좀 쉬라고.
스웨터에 진바지의 소탈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자발 머리 없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참 진지하다. 인터뷰 내내 농담 한 마디 없다. 자기 안에 없는 모습 그렇게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정말 타고난 연기자였다.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