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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사회 대책 서둘자]소비의 주역이 달라진다

입력 | 2003-10-07 19:46:00


“가구당 한 달에 10만원씩 계를 들어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다닙니다.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요. 평생 일했으면 이 정도 즐거움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올 4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4박5일 여행을 다녀온 한모씨(61)는 고교 영어교사로 30년간 일한 뒤 4년 전 퇴직했다. 한씨 부부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네 집과 함께 3년째 매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한씨는 “올 봄에는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유행했지만 실제 위험은 크지 않다고 해서 더 싼 값에 중국여행을 다녀왔다”고 귀띔했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도심형 실버타운인 서울시니어스 강서타워에서 회원들이 댄스 페스티벌에 참가해 춤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제공 서울시니어스 강서타워

한국사회의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소비 주체’로서 노인층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실버산업’도 서서히 활기를 띠는 추세다. 하지만 노인층의 낮은 소비성향이 한계로 지적된다.

▽쓸 데는 쓰는 노인 늘어=“노인 고객은 시간이 많아 젊은 사람보다 가격과 현지옵션 여부 등을 더 꼼꼼히 살핍니다. 중장기적으로 소비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불황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인터넷여행사 넥스투어(www.nextour.co.kr) 홍성원(洪成源) 사장의 설명이다. 요즘 이 여행사를 통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여행객 4명 중 1명은 60세 이상의 노인. 이들의 비율은 2년 전의 10%에서 크게 높아졌다. 이에 따라 60대 부부만을 겨냥한 여행상품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의 ‘오팔(OPAL)족’처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노인계층이 나타나고 있다. 오팔족은 ‘활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노인들(Old People with Active Life)’이라는 뜻의 신조어로 초(超)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 사회에서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른 노년층을 지칭하는 말.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高精敏) 수석연구원은 “고령화가 진전될수록 노인층이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면서 “고령화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미처 준비를 못한 기업들이 오히려 당황스러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동하는 실버산업=역동적 소비 노인계층을 표적으로 기업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5월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불곡산에 문을 연 서울대 분당병원은 노인층을 주 타깃으로 한 병원이다. 노인성 질환을 집중적으로 진료하며 800개의 병상 가운데 400개는 노인용으로 만들었다. 분당구 정자동에는 연강의료재단이 2004년 개원을 목표로 노인전문병원을 신축 중이다.

9월 초 역시 분당에 연면적 1만2000여평 규모로 세워진 ‘실버타운’인 서울시니어스타워는 최근 254가구의 입주신청을 받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140여명이 출자해 세운 의료서비스업체 ‘버추얼엠디’는 노령층 고객에 특화한 ‘노화 관리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윤대현(尹大炫) 버추얼엠디 대표는 “노화 관리란 노인들의 신체와 피부를 관리해주고 심리, 정신적 상담을 통해 건강을 유지해주는 서비스”라고 소개했다.

화장품업체인 ㈜태평양은 최근 식물성 유사호르몬 복합체를 이용해 노화된 피부에 좋은 화장품 ‘오뜨고아(Haute Goa)’를 개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낮은 구매력과 소비심리가 한계=1990년 이후 55세 이상 가구의 소득은 매년 10%씩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실버산업의 시장규모도 2000년 17조원에서 2005년에는 27조원, 2010년에는 41조원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그러나 통계청의 2002년 사회통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본인이나 배우자의 소득, 연금 등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60세 이상 노인은 55.8% 수준에 그친다. 반면 40.1%는 자녀 등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어 구매력에 한계가 있다.

의료경영 컨설팅업체인 ‘플러스클리닉’의 심형석(沈炯錫) 대표는 “일본의 전례를 볼 때 한국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0%를 넘어설 2010년을 전후해서 실버산업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인들의 낮은 소비성향도 실버산업 성장의 걸림돌로 지적된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의 송순영(宋順榮) 소비생활연구팀장은 “돈은 모으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목돈을 만들어 자녀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노인층의 사고방식이 실버산업 성장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노인들에게 적절한 소비방법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 실버산업 실태▼

‘지구상에 살았던 전체 노인 인구의 3분의 2가 오늘날 생존해 있다. 전통적으로 젊은층의 요구에 부응하던 산업계는 이제 새로운 노년층을 겨냥하고 있다.’

작년 10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고령화사회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실버 월드’의 모습에 대해 이같이 표현했다. 그만큼 노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소비의 주역으로 떠올랐다는 뜻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실버산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는 미국. 이미 1950년대에 실버 비즈니스가 등장했고 70년대부터 건강과 관련된 ‘헬스케어산업’을 중심으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고령자나 은퇴자를 겨냥한 주거단지인 실버타운은 미국 전역에 약 2만곳이 있다. 이 가운데 80% 이상은 민간기업이 운영한다. 또 7000여개의 노인 전문병원과 1만6000여개의 양로원, 1만2000여개의 가정의료소도 있다.

4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일본의 실버산업은 ‘고품질, 고급화’ 추세가 두드러진다.

일본 정부는 90년대 이후 고령자 복지를 위한 대책인 ‘골드플랜’을 추진하고 기업은 ‘실버마크 인증제도’를 도입해 실버상품의 고급화에 주력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노인 단독가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역(逆) 담보대출’이 노후대책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역 담보대출은 부동산을 담보로 매월 일정액의 생활비를 은행에서 빌려서 쓰고 나중에 부동산을 매각해 부채를 청산하는 금융상품.

고령층을 겨냥한 선진국 기업의 마케팅 전략과 상품도 돋보인다.

이탈리아의 프라다와 구치, 아르마니 등 명품 브랜드는 5년 전부터 노년층을 겨냥한 상품 라인을 내놓고 있다.

또 세계 최대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사는 최근 피부관리 제품광고에 젊은 모델을 쓰는 방침을 버리고 영화배우 카트린 드뇌브를 모델로 기용하기도 했다.

일본의 오츠카 제약회사가 고령자를 위해 선보인 안전자판기는 기존 제품보다 60% 이상 더 잘 팔리는 상품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권순활 경제부 차장

▽팀원=박중현 이나연 차지완

최호원 김광현 송진흡

신치영 신석호

고기정 기자(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