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은 제557돌 한글날. 매년 정부나 민간 주도의 한글 사랑하기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여전히 각종 상품명에서부터 사용설명서에 이르기까지 온통 외국어 투성이다. 특허청이 한글날을 맞아 8일 ‘우리말 상표 출원 현황’을 조사, 발표한 결과를 보더라도 지난달 말까지 특허청에 출원된 상표 11만35건 중 우리말 상표는 15.4%에 불과하다. 특히 의류(5.54%) 전자제품(12.6%) 화장품(14.8%) 등의 비율이 낮았다. 본보 취재팀이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상품 중 특히 정확한 정보전달이 중요한 의약품과 화장품의 사용 설명서를 조사한 결과 한글로 되어 있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거의 암호수준인 경우가 많았다.》
▼암호문인지… 藥설명서인지…▼
“도대체 어떻게 복용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주부 김애경씨(33·서울 강남구 역삼동)는 최근 비상약으로 보관 중이던 감기약을 먹으려다 결국 포기했다. ‘이 약은 도색의 정제입니다’(분홍색 알약이라는 뜻)로 시작되는 복용 설명서를 읽어보았으나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 결국 김씨는 다시 약국에 가서 약사에게 증세를 설명하고 새로 약을 샀다.
이처럼 대부분의 의약품 복용 설명서가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로 작성돼 있을 뿐 아니라 쉽게 쓸 수 있는 말도 관행적으로 어렵게 쓰고 있다.
T제약의 안약 설명서에는 ‘1일 3회 1방울 점안(도포)하십시오’라고 적혀 있다. ‘점안(點眼)’이라는 단어를 모르면 이 약이 안약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S제약의 소염 진통제는 ‘통상 성인에게 록소프로펜나트륨(무수물로서)을 1회 60mg 3회 경구 투여합니다. 연령, 증상에 따라 적의 증감합니다’라고 설명해놓았다. ‘무수물로서’는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단어로, ‘물을 뺀 성분(無水物)’이라는 뜻. ‘상완골상과염 등 동통에 양면의 박리지를 떼어 부착’ 등의 설명도 마찬가지.
전문용어는 쉬운 말로 대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초회량(처음 복용하는 양) 경구투여(먹는다) ‘쇽의 병력이 있는 자’(쇼크 경험이 있는 사람) ‘식도에 정류하여 붕괴하면’(약이 식도에 붙어서 녹아내리면) 등 쉬운 말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문장이 대부분이다.
설명서에 나와 있는 ‘경고나 주의’와 ‘부작용’ 부분은 더욱 심하다. ‘감염증을 불현성화할 우려가 있음’ ‘과민증의 기왕력이 있는 환자 주의’ ‘소인이 있는 환자’ 등은 일반인으로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특히 의약분업 이후 간단한 약은 스스로 판단해 사는 소비자들이 많아 오용과 사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화장품엔 영문모를 英文만▼
김모씨(54·주부)는 최근 노화를 방지해 준다는 ‘포어 타이트닝 실키 세럼’이라는 이름의 화장품을 선물로 받았으나 어디에 어떻게 쓰는 제품인지를 몰라 서랍에 넣어놓고 있다. 김씨는 “사용설명서에 영어가 워낙 많아 판매직원에게 설명을 듣고 쓸 생각”이라고 말했다.
영어를 비교적 잘 하는 젊은 세대도 어느 정도 추측만 할 뿐 사정은 비슷하다.
화장품은 명칭에서부터 ‘트랜스액티브 하이드레이팅 페이스 젤’ ‘리페어 화이트닝 트리트먼트’ ‘클리어 클렌징 폼’ 등 아무 설명 없이 영어로만 표기한 경우가 많았다.
또 사용설명서에는 ‘톤(색)’ ‘트러블(문제)’ ‘베이스(원료)’ ‘트리트먼트(관리)’ ‘리퀴드(액상)’ 등 한글로 쓸 수 있는 용어도 영어로 표기하고 있다.
문장도 ‘실키한(부드러운) 사용감 부여’ ‘천연 원료를 주 베이스(원료)로 한 내츄럴한(자연적인) 처방’ ‘피부 탄력을 보호하고 링클을 케어해 주는(주름살을 관리해 주는)…’ 등 영어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지난해 말 ‘제품설명서의 문장상태 연구’라는 보고서를 낸 국립국어연구원 김문오(金文五) 연구사는 “약품은 관행 때문에, 화장품은 여성들의 허영심을 부추기려는 전략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말을 쓰는 경우가 많다”며 “업계와 학계가 서로 힘을 모아 쉬운 우리말로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대전=이기진기자 doyo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