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남편을 둔 김희연씨(32·서울 강남구 도곡동)는 첫아이를 갖기 위해 지난해 다섯 번이나 인공수정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은 대략 1500만원. 수술비는 물론 약값, 검사비 모두 의료보험 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남편 봉급의 3분의 1 이상을 허공에 날렸다. 김씨는 몸도 힘들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시술을 계속해야할지 고민 중이다.
김씨는 “앞으로 저(低)출산이 국가적인 문제가 된다는데 아이를 못 가져 애를 태우는 사람부터 지원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출산억제 정책은 1990년대 중반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장기 비전은 아직 없다. 출산 정책이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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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정책뿐 아니다.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저출산 고령화가 몰고 올 ‘인구 지진(地震)’에 대한 국가 차원의 체계적, 장기적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개인 차원의 준비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청장년층들이 구체적인 준비 없이 국민연금만 믿고 막연하게 있다가는 ‘고난의 말년’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보건사회연구원 변재관(卞在寬) 연구위원은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고령화라는 의제를 최상위 개념에 놓고 정책을 짜야 한다”며 “효과가 길게는 수십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도 늦다”고 강조했다.
▽노인 인구를 지식근로자로 적극 활용=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한국은 고령화에 발목이 잡혀 구조적인 저성장 국가에 진입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서강대 송의영(宋毅榮·경제학) 교수는 “저출산 고령화로 노동인구가 줄고 저축률이 떨어지면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노인 취업, 여성인력 활용 방안을 마련하고 인적 자본과 각종 제도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경쟁력의 키워드가 점차 ‘근육’이 아닌 ‘지식’으로 바뀌고 있어 고령층의 축적된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면 기업이나 국가 차원에서 생산성을 올리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를 위해 고용장려금 지급 대상 확대, 노년층에 대한 재교육 등 인력정책 재편도 검토할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임금피크제’도 기업의 부담을 줄이면서 고령 지식근로자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출산할 여건을 만들어줘야=저출산 고령화 인구구조를 근본적으로 바로잡는 것은 출산율을 높이는 일이다.
정부는 올 8월 출산장려 대책으로 6세 이하 자녀 교육비에 대한 근로소득 공제확대, 육아휴직 장려금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 김현진(金縣眞) 수석연구원은 “사교육비 부담이 엄청나고 조기퇴직 풍조로 자녀 교육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 정부에서 몇 십만원 더 준다고 아이를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보육 체계 개편, 노년 취업 등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금체계 수술해야=기형적인 연금체계는 정부가 당장에는 욕을 먹더라도 수술해야만 하는 분야다. 연금문제는 노인 관련 예산 증가와 함께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갈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최근 들어 정부는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더 많이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연금체계를 손질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까지 악화될 줄 모르고 가입했던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
▽개인 차원의 대책도 서둘러야=대기업 부장인 박민구씨(43·서울 양천구 목동)는 최근 월급 가운데 60만원을 뚝 떼어내 개인연금에 가입했다. 대신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의 학원도 한 가지만 남겨놓고 다 끊었다. 박씨는 “50세 이전에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나면 다른 곳에 취직한다고 해도 현재의 소득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처럼 깊이 생각하고 노후대책을 마련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 많지 않다. 상공회의소가 최근 서울에 거주하는 20∼50대 직장인 1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후준비를 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32.4%에 불과했다.-끝-
▼선진국 고령화사회 준비사례▼
한국에 앞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선진국들이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대책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노인 고용 확대와 출산장려, 연금 수술.
노인 고용 확대 측면에서는 미국이 일찍부터 눈을 떴다. 노인들이 취업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1966년 연령차별금지법을 제정한 데 이어 86년부터는 정년 제도를 아예 없앴다.
일본도 91년 ‘고령자 고용촉진법’ 제정으로 60세 정년제를 확보했다. 또 요즘에는 65세 정년제를 목표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호주는 기업이 노인을 채용할 때 보조금 지급 등 인센티브를 주고, 연령을 이유로 해고할 때는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출산장려책은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을 펼쳐 자녀를 낳으면 산전 수당과 모성 수당을, 2명 이상의 자녀를 키우면 16세가 될 때까지 가족수당을 지급했다. 또 소득수준과 자녀수에 따라 주택수당도 주었다. 덕분에 유럽에서는 비교적 높은 출산율(2001년 기준 1.89명)을 보인다.
94년부터 도시지역 보육시설 확충을 주요 내용으로 한 ‘에인절 플랜’을 내세워 출산독려에 나선 일본은 초등학교의 방과 후 보호시간 연장, 유치원 서비스 확충 등 양육 인프라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87년 출산억제 정책을 폐기한 싱가포르도 ‘능력이 되면 세 자녀 이상을 갖자’는 슬로건을 앞세워 미혼 남녀의 결혼을 권장하는 등 각종 정책으로 1.6명에 머물던 출산율을 1.87명으로 끌어올렸다.
연금 제도에 손을 대는 선진국도 많다. 고령화로 인한 연금 재정 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것.
스웨덴은 98년부터 연금 지급 시기를 65세에서 67세로 늦췄다. 65세에 은퇴할 수도 있지만 일할 능력이 있다면 2년 더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신 67세까지 일하다 은퇴하면 더 많은 연금을 준다. 영국은 88년 연금 재정난으로 기초연금 액수를 줄였다. 또 65세 이상인 사람이 소득이 있기 때문에 연금 수령을 연기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도 실시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권순활 경제부 차장
▽팀원=김광현 송진흡 신석호 이나연 박중현 신치영 고기정 차지완기자(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