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선유도공원 내 ‘녹색 기둥의 정원’. 콘크리트 기둥 잔해가 설치미술처럼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광표기자
9일 오후 서울 한강 선유도공원 내 ‘녹색 기둥의 정원’.
지붕이 사라지고 폐허처럼 남아있는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카메라를 둘러맨 20대 젊은이들이 거닐고 있었다.
“올 여름에 갔던 로마 유적지를 걷는 것처럼 멋지지 않니? 앙상하고 삭막해 보이는 콘크리트 기둥이지만 부서진 흔적을 보니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낭만적이야.”
“로마에 비하면 규모는 훨씬 작지만 어쨌든 신선해서 좋아. 기둥에 그림이나 사진을 걸어놓고 전시회를 열면 아주 멋질 것 같은데. 저쪽 부서진 담장도 괜찮은데.”
많은 사람들이 선유도공원을 각종 수생식물이 자라는 생태학습공원, 야경(夜景)이 멋진 공원으로 이해하지만 이곳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콘크리트 건축물 잔해의 아름다움이다.
이곳은 2002년 선유도 정수사업소의 수돗물 정수처리 건물을 재활용해 조성됐다.
녹색 기둥의 정원에는 1000여평의 공간에 콘크리트건물 지붕을 걷어내고 기둥 30개를 남겨 놓았다. 기둥 윗부분엔 부서진 흔적과 철근들이 삐죽 솟아나 있다. 하나하나만 보면 거칠고 삭막한 폐기물이지만 30개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마치 옛 건축물의 열주(列柱·늘어선 기둥)를 연상시킨다. 그 기둥을 담쟁이 덩굴이 감싸 오르며 생명을 부여한다. 30개의 기둥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색다른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하나의 설치미술 같다.
기둥 정원 옆으로는 정수장 건물의 벽이 적당히 헐린 채 폐허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폐허가 아니다. 건물 벽의 잔해에선 식물이 자라고 꽃이 핀다. 부서진 콘크리트 벽을 따라 걷다보면 과거를 여행하는 듯한 낭만이 밀려온다.
이곳의 조경 설계에 참가했던 조경디자이너 정우건씨(39)의 설명.
“세월의 흔적을 살리는 데 가장 중점을 두었습니다. 콘크리트라는 삭막한 물질이지만 거기에 시간이 중첩되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앞으로 누군가가 이곳을 리모델링하거나 보수하더라도 그 세월의 흔적은 계속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청계고가를 철거하면서 남겨놓은 3개의 교각도 마찬가지다. 복원공사가 끝난 뒤 청계천변을 걷는 사람들은 청계 8가에 이르러 느닷없이 나타나는 거대한 콘크리트 교각에 놀랄 것이다.
정씨는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라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고 거리 미관을 새롭게 장식하는 독특한 조형물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종로구도 청계고가 교각과 콘크리트 상판의 잔해를 조각품으로 만들어 대학로에 설치할 계획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 조각가의 말.
“청계고가의 잔해라는 느낌을 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콘크리트 잔해를 너무 가공하거나 너무 꾸미지 말아야 합니다. 다소 거칠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움과 청계천 역사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이죠. 하여튼 서울 거리의 신선한 변신이 기대됩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