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기 짝이 없는 서재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는 차병직 변호사. 차 변호사는 종이신문과 종이책이 좋아 컴맹을 자처했다. 아직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으며 글도 원고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다.박영대기자 sannae@donga.com
“그리고…이건 제가 훔친 책입니다.”
법무법인 한결의 차병직 변호사(44)는 서가에 꽂혀 있던 누렇게 바랜 책 한 권을 빼내 보였다. 경문사에서 단기 4292년에 펴낸 피천득 선생의 ‘금아시선집’이었다.
“77년 재수 시절 세 들어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집주인이 부려놓은 이삿짐 속에서 이 책을 발견했죠. 그냥 달라고 하면 줄 것 같지 않아서….”
공소시효도 지났으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차 변호사는 책 욕심이 많다. 8일 서울 관악구 신림10동 차 변호사 자택의 공부방에 들어서니 책으로 사방을 꽉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방바닥이 온통 책으로 어질러져 있다. 변호사 사무실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래야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나.
차 변호사의 단골 책방은 밤 12시가 넘도록 문을 열어두는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 변호사 일로,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일로 귀가가 늦는 차 변호사는 매주 1, 2회 습관적으로 책방에 들러 책을 산다. 책은 주말에 서재에 틀어박혀 집중적으로 보는 편이다. 볼펜 없이는 책을 못 읽는 체질이어서 반드시 책상 앞에 앉아서 본다. 밑줄을 긋고 떠오르는 단상을 메모하기도 한다.
“법률 지식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이 모른다 뿐이지 그다지 심오한 것은 아니지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려면 인문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등 두루두루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분쟁 해결에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책상 위에는 요즘 펼쳐보는 책들이 쌓여 있다. ‘인듀어런스’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뜬세상의 아름다움’ 등 베스트셀러와 함께 ‘국제인권법’ ‘인권과 국제정치’ ‘과학기술과 인권’ 등 차 변호사의 전공 영역을 다룬 책들까지 한 무더기다.
서가엔 고려대 법학과 재학시절 영문과 강의실을 기웃거리며 사 모은 ‘노턴 앤솔로지’ ‘16세기 영시’와 ‘원자폭탄 만들기’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김우창 전집’ 등이 뒤죽박죽 꽂힌 채 위 아래로 서로를 베고 누워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찾는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찾기가 힘들어 똑같은 책을 2, 3권씩 사기도 한다.
“저는 양반이에요. 안경환 서울대 법대 학장은 이미 읽은 책인 줄도 모르고 새로 사서 줄쳐가며 읽다 보니 전에 읽던 책과 줄친 부분까지 같았대요.”
차 변호사가 일독을 권하는 책은 덴마크 작가 페테르 회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과 스위스 국민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뒤렌마트의 소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정에서는 유죄를 증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결과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내용이다. 이 책을 읽고는 ‘과연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회의하게 됐다고.
요즘엔 대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인권에 관한 쉬운 개론서를 준비 중이다. 얼마 전에는 청소년이 읽을 만한 인권 교과서인 ‘사람답게 아름답게’(바다출판사)를 펴내기도 했다. ‘홍당무’ ‘라퐁텐 우화’ ‘메리 포핀스’ ‘말괄량이 삐삐’ 등 50여편의 동화와 우화를 인용해 간접적으로 인권과 법을 이야기한 소박하고 맑은 책이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