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임명 제청과 관련한 사법파동의 와중에서 8월 18일 사법 사상 처음으로 열린 ‘전국 판사와의 대화’ 참석자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1년 법원 정기인사 때의 일이다. 대법원장의 사위이기도 한 A판사는 서울행정법원 근무를 희망했다. 그는 ‘성적’도 동기 중 4위여서 무난히 원하는 임지로 갈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하필 성적이 그보다 앞선 3명이 모두 행정법원을 지원했다. 서열에서 밀린 그는 결국 다른 재경(在京) 지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성적’은 법관 인사의 핵심이다. 법원은 1979년 이전에는 연령을 서열의 기준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성적(연수원 성적 60%, 사법고시 성적 40%)으로 서열을 정하고 있다.
즉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 같은 기수의 법관들은 1위부터 꼴찌까지 등수가 매겨지며 이 서열이 평생을 따라다닌다. 초임 법관의 부임지는 대부분의 경우 서울부터 남도 끝까지 서열순으로 거리에 반비례해 정해지고 이후 2년에 한번씩 하는 인사 때에도 서열순으로 희망 임지에 가게 된다.
법원은 광복 이후 큰 틀에서 변화 없이 줄곧 서열 중심의 인사를 해 왔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 인사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게 하고 주관적 판단에 따른 공정성 시비를 막아준다. 이는 또 정치권으로부터의 외풍을 원천적으로 차단, 법관이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게 법원측의 설명이다.
서열은 대법관 임명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법관의 유일한 승진 인사인 고법부장판사 인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고법부장판사 인사는 서열 외에 근무평정도 함께 고려하지만 법원장이 작성하는 근무평정 역시 결과적으로 ‘서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올 2월 정기 인사에서 승진 대상 기수인 연수원 11기의 경우 서열 1위에서 8위까지 8명만 고법부장으로 승진했다.
또 80∼90여명의 동기 법관 중 8∼10명만이 거칠 수 있는 법원 행정처 심의관, 담당관 근무 역시 서열이 앞선 법관들이 주로 차지하고 있다. 법관 경력 12∼13년차 중 ‘똑똑하고 능력 있는 판사만 거친다’는 행정처 경력은 ‘고법부장 승진의 터 잡기’로 불릴 정도로 승진의 보증수표로 통한다. 이 때문에 법원 내부에서는 행정처 출신을 종종 ‘왕당파’로 부르곤 한다.
이처럼 두꺼운 서열의 벽 때문에 법관 인사는 종종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비유되기도 한다.
지방의 한 판사는 “서열이 낮아 지방으로 초임 발령을 받은 법관 중 법원 행정처로 가는 경우는 기수당 한두 명에 불과하다”며 “연수원 성적이 수십년의 법관 인생을 좌우하는 지금의 인사제도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헌법 제106조는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않는다”고 명시해 법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있다. 또 법원조직법은 판사의 정년을 63세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관들은 경력 21∼23년째가 되면 판사로 남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최근 10여년의 통계를 보면 기수당 57%만 고법부장으로 승진하고, 나머지 법관들은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개업하고 있는 것.
이처럼 경직된 법관 인사에 대해서는 법원 안팎에서 비판론이 적지 않다. 현재의 사법개혁 논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 서울지법 문흥수(文興洙) 부장판사는 지난해 3월 “현행 법관 인사 제도가 인격권 행복추구권 평등권 공무담임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기도 했다. 서열로 고법부장 승진 여부를 가리는 현행제도를 고쳐 모든 법관들이 승진 걱정 없이 정년까지 재판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문 부장판사의 주장이다. 또 일각에서는 법원이나 재판부의 기능에 따른 전문성을 고려해 법관 인사를 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때문에 법원은 올해 법관 인사제도개선위원회를 구성했고 조만간 인사제도개선안을 마련해 이르면 내년 인사부터 새로운 인사 방식을 적용할 방침이다.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서열’에 따른 피라미드식 법원 조직의 한 구성원에 불과한 법관에게는 ‘양심에 따른 재판’에 몰두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적지 않다. 진정한 사법개혁은 이러한 장애물을 하나하나 허물어 가는 과정이 돼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조언이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