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처음으로 관객 1만명을 돌파한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의 박기복 감독이 이 영화의 흥행 성공 요인과 한국 다큐멘터리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박영대기자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이 수립되던 그 시점에 한국 영화계에서도 새로운 기록 하나가 조용히 세워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관객 1만명 돌파. 추석 연휴 서울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에서 개봉한 ‘영매(靈媒)-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는 지금 한국 기록영화의 흥행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종전 최다 관객은 일본군위안부를 다룬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세운 5600여명. 지금 ‘영매’의 기록은 극영화로 치면 100만 관객 돌파를 능가한다는 게 영화계의 평가다.
‘영매’는 한국의 무당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귀신의 존재 여부를 밝히거나 초월적 세계를 엿보는 작품이 아니다. 굿판 도중 철철 눈물을 흘리는 무당이 등장하는 첫 장면이 보여주듯 이 사회에서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살아야 하는 무당의 애달픈 삶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사회에서 ‘무속(巫俗)의 세계’는 조선시대 이후 늘 괄호 속에서만 존재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는 굿을 하거나 점을 보면서도 공적인 담론의 세계에서는 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만든 박기복(朴技馥·38) 감독은 한국의 샤머니즘 전통에 대해 화해의 손길을 내민 인물이다.
“귀신의 존재는 명징하게 인식할 수 없는 것인 데다 설사 귀신이 있다 해도 거기 매달리는 삶은 퇴영적일 수밖에 없죠. 그러나 수천년을 이 땅의 민중과 함께해 온 삶의 방식으로서 그 전승적 가치는 존중받아 마땅하지 않을까요.”
영화는 무당의 피를 이어받은 세습무가 벌이는 동해안 별신굿과 남해안 씻김굿, 그리고 신 내림 받은 강신무가 벌이는 한수 이북의 굿판 등을 아우르면서 무당의 삶 속에 스며 있는 비극성을 포착한다. 마지막에는 평생 무당으로 살다 죽은 언니의 마지막 길을 씻김굿으로 풀어내는 동생 무당의 한바탕 한풀이를 통해 한국 무속에 담긴 카타르시스의 미학까지 건져낸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관객은 무당들의 한 많은 사연에 가슴이 메고, 다시 그 불쌍한 영매를 통해 화해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비극적 사연에 눈시울을 적신다.
박 감독은 영화를 찍기 위해 1년6개월간 전남 진도, 경북 포항 영주, 강원 속초 강릉, 인천 등에서 수십 명의 무당과 동고동락했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의 운세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무당이 타는 작두의 날이 서 있는지 아닌지를 따지거나, 죽은 사람의 사주팔자를 알아보는지를 검증하는 식의 접근이야말로 주류가 비주류를 바라보는 왜곡되고 폭력적인 시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386세대인 박 감독은 한국사회 비주류의 삶을 끊임없이 추적해 왔다. 1994년작 ‘행당동 사람들’은 철거민의 삶을 담았고, 같은 해에 만들어진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는 서울역 노숙자의 삶을 그렸다. 99년 서울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냅둬’는 거리의 부랑아들을 다룬 작품이었다.
“저는 80년대 운동권의 권력 비판이 똑같은 권력화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에 반감을 가졌어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삶을 거대 이데올로기에 짜 맞춰 수학문제 풀듯 쳐낸다고 생각됐거든요. 그래서 어떤 문제의식을 전제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92년 대학을 졸업한 박 감독은 1년 동안 이벤트업체 PD 생활을 한 뒤 한동안 영화만 보며 사는 ‘시네마 룸펜’ 시절을 보냈다. 그때 매료된 것이 최근 고인이 된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이나 일본 다큐멘터리의 거장 오가와 신스케의 기록영화였다.
“그들의 작품은 달착지근하게 재구성된 TV 다큐와 분명히 달랐어요. 날것의 삶, 팩트(fact)의 세계가 안겨 주는 충격과 진실의 힘에 압도당한 거죠.”
94년 8mm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집단 푸른영상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씨의 ‘울림의 문학’이라는 표현을 빌려 저는 ‘울림의 영화’를 지향합니다. 아무리 진실의 힘이 충격적인들 영혼의 현(絃)을 퉁길 수 없다면 예술이 될 수 없으니까요.”
‘영매’도 그런 울림통을 지니고 있다. ‘씻김굿’이라는 제의적 전통에 담긴 산 자와 죽은 자의 눈물 어린 화해가 그것이다.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는 상처는 많은 경우 가족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영매’의 힘은 관객 스스로 그런 개인적 한과 응어리를 성찰하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한 무당의 말처럼 죽어서 푸는 게 그처럼 힘들다면 살아 있을 때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깨달음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굿은 죽음을 삶의 한복판에 두어 이승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순기능을 갖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죽음을 통한 삶의 반추’가 주류 종교들만의 몫일 수는 없는 터다.
‘영매’는 한국다큐멘터리와 대중의 화해라는 성과도 거뒀다. 그는 불혹을 앞두고 올해 얻은 첫딸만큼 소중한 그 축복이 이어지기를 기원했다.
“역사와 사회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관객을 공부시키려 하지 말고 관객을 웃기고 울릴 수 있는 기록영화가 계속 나온다면 관객의 호응도 계속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박기복 감독은…▼
△1965년 서울 생
△1984년 용문고 졸업
△1992년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94년 기록영화 ‘행당동 사람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제작
△1999년 기록영화 ‘냅둬’로 제3회 서울다큐멘터리 영상제 대상 수상
△2002년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로 부산국제영화제 운파펀드상 수상
△대만 다큐멘터리 영화제 초청
△2003년 뮌헨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초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