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역사학자인 제임스 팔레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왼쪽)과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은 “남북문제나 북-미간 대화 등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와 미국인의 이해 수준을 높이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미옥기자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주도하며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카터 에커트 교수(하버드대) 등 저명한 한국학 연구자들을 길러낸 제임스 팔레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69·한국사)과 동료 사학자로 그와 오래 교유해 온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79·동양사)이 최근 본사 회의실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요즘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팔레 원장이 1963년경에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느라고 서울대 규장각에 와 있을 때 처음 만났으니 우리 인연도 벌써 40년이나 되는군요. 작년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왜 한국사학 분야에 외국인 교수를 데려오느냐’ ‘하필이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학자를 데려오느냐’ 하고 학계에서 말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제임스 팔레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저를 보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저는 일제 통치가 한국사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모두 보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식민지 정책과 비교하면서 그것이 광복 후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연구하다 보니 긍정적 영향도 인정하게 된 겁니다.
▽고=일제 통치 때문에 근대화가 “잘 됐다” “안 됐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곤란하겠지요. 일제강점기 전부터 실학에서 개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혁의 싹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것이 식민통치에 의해 촉진된 점도 있지만, 교육 분야처럼 개화 또는 개혁이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지연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팔레=동아시아학술원에서 외국인인 저를 데려온 것은 약 30년 동안 워싱턴주립대(시애틀 소재)에서 학제간 교육에 참여한 경험을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제간 연구는 한국에 비해 미국이 더 활발하니까요.
두 원로 학자는 한국을 바라보는 국내외의 시각이 적잖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국내외 학자들이 교류할 기회를 많이 갖는 것이 좋다는 데 동의했다. 이어 두 학자는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한국과 미국의 시각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팔레=미국에서 볼 때 한반도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북한과의 교섭을 달가워하지 않는 조지 W 부시 정부의 정책 때문이죠.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해 주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북핵 문제는 기본적으로 평화적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라크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를 통치하는 방법을 못 찾고 있는 부시 정부가 당장 북한까지 공격하기는 어렵겠지만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죠. 저는 우선 부시 정부가 어느 정도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해야 북한과 협상도 되고 남북간 평화적 교류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역사학자로서 길게 내다본다면 한반도 문제는 한중일 삼국의 테두리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동북아 삼국의 문화적 친근성을 더욱 유지 발전시키면서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약했던 상호평등의 관계를 강화해야 해요. 북한 문제도 ‘문화적 친근성과 평등성’을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 동아시아 삼국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도록 종용해야 합니다.
두 학자는 또 미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가는 상황에서 지역학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고 재정 지원도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우려했다.
▽팔레=미국인들이 한국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야 하는데 현실은 어렵습니다. 워싱턴주립대의 경우도 정년퇴임한 한국학 전공 교수의 후임을 채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 당국으로부터 2005년까지 100만달러를 모으면 기금교수의 형식으로 후임을 정식 채용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 대학 출신 한국인들이 중심이 돼 기금을 모으는 중입니다. 특히 학교가 있는 시애틀에 기반을 두고 한국에 많은 상품을 수출하고 있는 기업인 보잉, 마이크로소프트, 스타벅스 등이 지원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고=최근 한국의 정치 경제적 존재가 상대적으로 뚜렷해지다 보니 과거와 달리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 관심은 약화되는 듯합니다.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문화 역사 부분에 관심을 일으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대담자 약력▼
●고병익
1956년 서울대 박사 (동양사전공)
1958~1980년 연세대 동국대 서울대 교수 역임
1970년~현재 학술원 회원
1979~1980년 서울대 총장
1982~1991년 한림대 교수
1994~현재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2002~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 '동아교섭사의 연구' '동아시아의 전통과 근대사' 등
●제임스 팔레
1968년 미국 하버드대 박사 (동아시아학 전공)
1968~2001년 워싱턴주립대 교수
2001년~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장
저서: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 '유교적 경국책과 조선의 제도:유형원과 조선왕조 후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