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사교육 실태가 이미 우려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도태시키고 대다수 서민 가계를 짓누르는 수준까지 와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교육개발원과 공동으로 사교육 문제를 진단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해 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1부에서는 급격히 팽창한 사교육의 실상과 그 원인을 5회에 걸쳐 진단한다. 2부에서는 사교육의 폐해를 다양하고 과학적인 조사와 통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전문가들과 함께 모색한 바람직한 대안을 일주일 간격으로 싣는다.》
“새벽까지 학원 수업에 시달리다 보면 잠은 4, 5시간도 채 못자요. 부족한 잠은 학교에서 ‘마음 좋은’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보충하죠.”
15일 오전 1시경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온 한 여고생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 J고 3학년생 남모양(18)의 별명은 ‘학원녀’.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미대 지망생인 남양은 오후 3시반경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오전 1시까지 미술 영어 국어학원에 다닌다. 일주일에 3일은 오전 1시부터 3시까지 집에서 수학 개인과외를 별도로 받는다.
▽사교육에 멍드는 학생들=한창 자라날 학생들이 과도한 사교육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멍들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1년 전국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초등학생의 70.5%, 중학생의 63.9%, 고교생의 48.3%가 학원 강의나 개인과외 등 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과외금지 조치 이전인 1980년 실시한 조사에서는 이 비율이 초등학생 12.9%, 중학생 20.3%, 고교생 26.2%에 불과했었다.
20년 만에 사교육을 받는 학생이 초등생은 5.5배, 중학생은 약 3배, 고교생은 약 2배로 늘었다. 자녀수가 줄어들고 소득이 향상됨에 따라 초등학생의 사교육은 큰 폭으로 늘었다.
서울 S초등학교 5학년생 박모군(11)은 오전 7시에 일어나 세수와 아침식사를 한 뒤 7시40분부터 20분간 영어 과외교사로부터 전화 수업을 듣고 등굣길에 오른다. 오후 2시에 학교 수업을 마치면 3시부터 각종 학원수업과 개인과외 교습이 박군을 기다린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는 오후 7시부터 한 시간 동안 테니스 강습도 받는다.
박군은 밤 9시부터 수학 국어 과학 등 3개 과목 학습지를 풀고 학원과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하고 나면 밤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다. 주말에는 한강시민공원에서 축구 농구 뜀틀 등 체육 과외도 해야 한다.
▽불황 비웃는 사교육 시장=국세청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학원 수는 2000년 5만3208개에서 2001년 6만4833개, 2002년 6만7621개로 늘었다.
이들 학원이 신고한 매출액만도 2000년 3조635억원, 2001년 3조8926억원, 2002년 4조6552억원이다. 많은 학원이 규정보다 많은 수강료를 받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매출액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6월 현재 서울시내 학원 수는 1만2414개. 이 가운데 강남 서초 송파 강동구에만 3875개가 몰려 있다.
지하경제화한 국내 사교육시장은 14조∼30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산업연구원은 학원이 전체 사교육에서 약 46%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왜 사교육은 팽창하는가=수요와 공급의 논리는 교육시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교육은 학교와 달리 시시각각 변신하며 교육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울 H고 2학년생 김모군(17)은 “학교 수업은 전체 급우의 평균 수준에 맞추어 진행되는 데다 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적지 않은 학생들이 시간만 낭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학생 개개인을 잘 아는 학원에서 진학 상담도 받는다”고 말했다.
학부모 이모씨(43·서울 서초구 반포동)는 “얼마 전 학교에 학부모 시험감독으로 갔는데 한 학생이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하니까 교사가 ‘그냥 아무거나 찍어’라고 하더라”면서 “그때 ‘내 자식은 내가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말했다.
▽학부모 울리는 상혼=학원은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불안한 학부모들을 현혹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경시대회, 영재교육 등을 빙자해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학부모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중학교 1학년생 아들을 둔 김모씨는 아들을 특수목적고 전문학원인 대치동 P학원에 등록시키려 했다가 실력이 부족하다고 거절당했다. 학원측은 자존심이 상한 김씨에게 “다른 학생 몇 명을 더 모아오면 별도로 반을 편성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한 학원장은 “강사 전원을 명문대 출신이라고 거짓 광고를 하거나 명문대 합격자 수를 부풀려 발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비뚤어진 교육경쟁…계층간 위화감 불러▼
사교육은 개인의 교육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학교 교육 이외의 교육과 학습과정에 참여하는 교육행위다. 사교육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인 개인적 자유활동에 속한다.
하지만 사교육의 영향이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합당한 이익’에 영향을 주는 정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교육은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개인적 차원의 사교육이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사교육의 ‘효과’가 상당해야 할 것이다. 만약 사교육이 그 의도한 목적에 비춰 아무 효과가 없다면 우리가 사교육에 대해 ‘시비’를 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사교육의 중심에는 ‘사회적 적자생존’을 위한 경쟁이 있고, 경쟁이 사교육의 중요한 동인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나쁘다고 탓할 수는 없다.
사교육의 문제는 경쟁을 위한 개인의 노력이 다른 사람에게 더 노력하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강박감을 줘 과외나 학원수강을 하도록 내몰고 이 과정에서 대다수 학부모들이 과중한 과외비 부담을 안게 되는 교육의 경쟁구조에 있다.
만약 과외가 교육 경쟁에 효과가 있다면, 고액의 과외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계층과 감당하기 어려운 계층간에 교육기회의 불균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정의에 관련된 문제가 된다.
만약 과외가 인간의 적성과 재능을 계발해 주는 효과가 없다면 과외교육에 들인 경제적 낭비와 불필요한 학생들의 학습부담이 문제가 된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학업성취 평가에서 과외는 단기적 성적향상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미래 지식기반 사회에서 창의적인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은 계발되기 어렵다.
우리사회는 교육적으로 합당하지 못한 기준을 토대로 경쟁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과외로 인한 교육기회의 불균등이 유발된다고 볼 수 있다. 과외효과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 가능하려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포함한 학업성적 자료를 연구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료를 분석하게 될 때 한국사회의 비교육적이고 비효율적인 교육경쟁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사교육비의 과중한 부담’을 문제로 규정하고 ‘사교육비 부담 경감’을 주요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연구하고 있는 사교육비 경감 방안은 바로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우리 사회는 사교육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이것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동아일보와 한국교육개발원은 이 가능성을 점검하고 문제 해결의 방향과 핵심 과제에 대한 방안을 논의하려 한다.
이종재 한국교육개발원장
▼부모의 막연한 불안감에 사교육 시키는건 아닌지…▼
“학생이 원할 때 필요한 과목에 한해 사교육을 받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전상룡(全相龍·서울 동덕여고 교사) 부회장은 최근의 사교육 열풍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아이가 너무 많은 사교육을 받다 보면 체력이 소진돼 정작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 또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이 없어지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데서 답을 찾게 돼 창의성과 사고력 발달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다.
“대학 입학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죠. 스스로 공부할 줄 모르는 학생은 대학에 가서 제대로 공부하기가 힘듭니다.”
전 부회장은 부모가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아이에게 과도한 사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닌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두 아들을 둔 학부모이기도 한 그는 자녀를 학원에 거의 보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의 아들은 학교에서 ‘괴물’로 통한다.
그는 “아이들이 먼저 학원에 다니겠다고 말하면 논의해 필요한 과목만 수강하게 합니다”면서 “학생들은 대부분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부모는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혼자 공부한 아이는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과 자신감을 느끼게 돼 결과적으로는 학습 효과가 더 뛰어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전 부회장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성적 이외에 사회성 등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다른 능력’들은 평가절하되고 있다”면서 “학부모들이야말로 성적 이외에 다른 능력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가장 잘 알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상룡 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