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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서]具常 시인의 향기

입력 | 2003-10-17 18:59:00


원로시인 구상(具常·84)씨가 장애인 문학잡지 계간 ‘솟대문학’에 2억원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본보 10일자 A20면 참조) 뒤 15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한 음식점에서는 ‘구상 솟대문학상 운영위원회’가 마련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솟대문학’ 발행인 방귀희씨는 구씨가 후원금을 낸 것은 모두 세 차례였다며 그 구체적인 과정을 밝혔다.

그가 돈을 처음 기부한 때는 베트남전 참전 후 거식증을 앓던 맏아들 구홍씨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99년이었다. 구씨는 방씨를 불러 “홍이가 남기고 간 돈”이라며 5000만원을 주었다. 이듬해 구씨는 “1억원은 돼야 무슨 일을 해도 하지 않겠느냐”며 출처는 밝히지 않고 5000만원을 재차 기부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서재와 자택 두 채로 분리돼 있던 서울 여의도의 아파트를 한 집으로 줄인 뒤 ‘남은 돈’이라며 또 1억원을 건넸다. 방씨가 “나중에 천천히 주셔도 된다”고 하자 구씨는 “사람이 늙으면 정신이 흐려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주고 싶어도 못 주니 지금 가져가라”고 했다.

구씨는 1991년 ‘솟대문학’ 창간 때부터 잡지 발행과 장애인 문인들의 글쓰기를 조용히 지켜보며 격려해 왔다. 방씨는 구씨의 시 ‘홀로와 더불어’에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며 이날 시를 낭독했다.

“나는 홀로다/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나는 더불어다./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이렇듯 나는 홀로서/또한 더불어서 산다.//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병상의 시인은 말이 없지만 그 영혼의 향기는 깊고 짙게 퍼져간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