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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재경부·예산처멀고먼 승진의길

입력 | 2003-10-19 18:03:00

현 정부 경제부처 장관들의 대다수가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출신이어서 경제장관회의를 열면 선후배간 회의가 되는 수가 많다. 6월 29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김진표 부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 등과 함께 토의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1월, 행정고시를 통과하고 중앙공무원 연수를 마친 예비 경제관료들이 초조하게 부처배치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평생 진로가 정해지는 순간. 부처배치는 시험 성적과 연수원 성적을 절반씩 합산해 성적순으로 부처를 고르는 방식이다.

총 88명 가운데 재정경제부에 할당된 인원은 22명. 발표결과 1등에서 10등까지는 물론 상위 30등 안에 들어간 연수생들이 줄줄이 재경부를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전해에도 1∼14등 가운데 1명을 빼고는 모두 재경부를 지원해 인사배치를 주관하는 담당자들을 당혹케 했다.

우기종(禹基鍾) 재경부 총무과장은 “일부 수습 사무관들 사이에 비교적 ‘삶의 질’을 추구할 수 있는 국세청 같은 외청(外廳)을 선호하는 추세도 늘고 있지만 아직은 재경부나 기획예산처의 인기가 높다”고 말한다.

재경부와 예산처는 옛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맥을 잇고 있는 핵심 경제부처다. 여기서 근무하는 정통 경제관료들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한강의 기적은 경제 관료의 작품’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아무리 민간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커졌다 해도 이들에게는 ‘우리가 없으면 한국 경제가 안 된다’는 책임감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 예비 정통관료도 일단 처음 사무실에 배치돼 자리에 앉는 순간엔 잠시 암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되는 것.

10년 이상 선배가 여전히 자기와 똑같은 책상을 쓰는 사무관이고 ‘과장’ 직함을 달기까지는 아무리 빨라야 15년이 걸린다. 그래서 한 경제부처 공무원의 중학생 아들이 아버지 직업을 ‘사무관’으로 적었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을 정도다.

우등생들로 구성된 재경부 예산처 등의 초임 간부들에 대한 평가는 다른 부처에 비해 ‘능력’이란 잣대가 비교적 엄격히 적용되는 편. 경제 정책은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집값이 얼마나 안정됐는지, 경제성장률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등의 결과가 구체적인 숫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직원의 능력 역시 객관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예산처의 한 간부는 “새 정부 들어 인기투표 방식의 다면평가가 도입돼 ‘특별히 인간성이 좋지 않은’ 직원을 걸러주는 효과는 있지만 개인평가의 가장 큰 잣대는 능력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사무관을 거쳐 과장이 돼도 경제관료의 야전사령관인 ‘국장’이 되려면 다시 10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행시 22회인 재경부 최모 국장도 부처 내에서는 항상 ‘선두’ ‘초고속 승진’이란 말을 들어왔지만 사무관으로 임용된 지 23년 만인 올해에야 ‘국장’ 이름이 달린 보직을 받았다.

적절치 못한 행실로 공무원 옷을 벗었던 최낙정(崔洛正)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행시 17회로 장관까지 됐으나 재경부와 예산처의 행시 동기들은 대부분 고참 국장급이다.

그러나 일단 국장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실무 능력은 기본이고 ‘정치력’과 ‘관운(官運)’에 따라 경제관료의 길은 급격하게 달라진다.

김진표(金振杓)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뿐 아니라 장차관 이상 경제 고위관료는 옛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아우르는 ‘범(汎) 재경부’ 출신이 대부분. 현재 경제수장(首長) 격인 김 부총리는 1974년 행시 13회로 공무원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지 19년 만에 재무부 세제심의관(국장)이 됐고 5년 뒤 1급으로 승진했다. 그 뒤 차관, 국무조정실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4년3개월 만에 부총리에 올랐다.

이 밖에 박봉흠(朴奉欽) 예산처 장관, 이영탁(李永鐸) 국무조정실장을 비롯해 모두 6명의 장관이 범 재경부 출신이다.

특히 같은 경제부처로 분류되는 산업자원부(윤진식·尹鎭植), 건설교통부(최종찬·崔鍾璨), 해양부(장승우·張丞玗)의 장관까지 범 재경부 출신이 차지하고 있어 해당부처의 관료들을 민망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전윤철(田允喆) 전 경제부총리가 감사원장에 임명돼 정통 경제관료의 진출 범위를 넓혔다는 평을 듣고 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