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거의 없는 카툰으로 여운짙은 작품 세계를 가다듬어온 이용명 교수. 최근 8년만에 작품집 ‘사이로 여행기’를 냈다. 원대연 기자
“카툰을 그린 지 40년이 지났지만 붓만 들면 아직도 어린 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요.”
평생 이런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이로’(史二路)라는 필명으로 카툰을 그려온 이용명(63)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최근 ‘사이로 여행기’라는 카툰집을 냈다. 1995년 이후 8년 만에 내는 신작. 그는 오랜만에 책을 낸 이유에 대해 “출판사에서 ‘상업성이 없다’고 여러 번 퇴짜 맞은 작품들을 모았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의 카툰은 출판사의 말대로 돈벌기 어려운 ‘순수(정통) 카툰’이다.
카툰 시장의 주류는 촌철살인의 풍자와 상황을 비트는 유머를 담은 ‘시사 카툰’. 하지만 그는 제목도 설명도 없이 그림으로만 모든 상황을 알게 하는 ‘순수 카툰’을 데뷔 때부터 고수해왔다. 종합일간지와 스포츠지를 비롯해 여러 잡지들에 작품을 연재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독자가 많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필명 사이로(史二路)는 그가 한양대 법대를 졸업하고 ‘돈 버는 취직이냐. 배고픈 만화가냐’를 놓고 고민했을 때 지은 것. 그는 두 가지 길(二路)에서 만화,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없는 카툰의 길을 택했다.
“시사 카툰이 냄비에 물을 급하게 끓이는 것과 같다면 제 카툰은 무쇠 솥에 물을 은근히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쪽이 좋으냐는 취향의 문제지만 제 카툰은 몇 십 년이 지나도 여운이 남고 기억되는 작품일 거예요.”
펜도 끝을 잘라 뭉툭하게 만들어 쓴다. 캐릭터도 눈 코 입을 제대로 갖춘 경우가 별로 없고 그저 남녀노소만 구별할 만큼 단순하다. 그래서 딱히 대표적인 캐릭터도 없다.
“데뷔 때보다 점점 더 그림이 해체되는 것 같아요. 20년 전 작품을 보면 꽤 세밀하게 그렸는데 이젠 선 몇 개, 점 몇 개로 그림을 끝내는 경우도 많아요.”
주제도 환경파괴나 문명 비판 등에서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새가 별을 물어 나뭇가지에 얹어놓는 장면’을 골랐다. 그러나 그림이 단순할수록 작품에 쏟는 열정은 오히려 더 뜨겁다.
“만화가 단순할수록 내적인 운율이나 리듬감이 있어야 합니다. 담고 싶은 주제에서 선 하나, 점 하나라도 어긋나지 않도록 치밀한 계산이 필요해요.”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어떤 날은 아이디어가 샘솟아 카툰이 술술 그려지기도 한다.
“오래 카툰을 사랑했더니 이젠 카툰이 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카툰이 저를 선택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