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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만나는 시]박경리, '대추와 꿀벌'

입력 | 2003-10-21 18:09:00


꿀맛에 취해 허랑방탕하게 사는 사람은 가슴 뜨끔할 것이요, 귀밑머리 흰 주름 얼굴은 돌아갈 날을 헤아릴 것이요, 철모르는 어린아이는 진저리치며 저만치 사립문 밖으로 내어던질 것이나 이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푸른 가을 하늘은 얼마나 눈부신 것인가?

대추 한 알에 목숨을 바꿨구나, 혀를 차려니 지구 한 알에 다글다글한 꿀벌 중 하나인 우리들 아닌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도 지금 할 일은 단 하나. 대추는 많고 가지는 휘어도 저 꿀벌 머리 박을 대추는 저것 하나렷다. 몰두(沒頭)란 본디 진드기가 소 잔등에 붙어 머리를 처박는 모습에서 유래했단다. 이것저것 따지다간 두꺼운 쇠가죽을 어찌 뚫을 것인가? 몰두는 때로 근시안처럼 보이나, 우주를 보는 망원경도 한쪽 눈 가려야 잘 보이는 법.

‘삶과 죽음의 如實한 한 자리’ 노 시인의 손바닥 위에 가을볕 한 줌이 봉분이다. 내년 봄 다시 꿀벌 잉잉거리고 대추나무 움 자라리라.

반칠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