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예전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성격 탓에 ‘정계의 이단아’ 또는 ‘헨진(變人·이상한 사람)’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구조개혁을 명분으로 정권을 잡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 조작 능력까지 발휘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불황이 계속될 것만 같던 일본 경제에도 부활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운이 좋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가장 의외의 일이 벌어지는 곳은 미국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세계를 누비며 싸우는 상황이 펼쳐지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독일의 한 국제정치학자는 도쿄(東京)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세계가 맞닥뜨린 문제는 지구 환경오염이나 에이즈처럼 국경을 넘어 각국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들인데 워싱턴에서는 ‘위협’ ‘적’과 같은 앞 세기의 용어들만 난무한다”고 개탄했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만 해도 군사대국 미국에 위협을 가하고 공공연히 적대시하는 나라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 9·11테러가 일어난 것이다.
다소 핵심에서 벗어난 매파에 불과했던 부시 대통령은 일약 시대적 정서를 대변하는 인물로 부각됐다. 그의 사고는 시대에 뒤떨어졌을지 모르지만 미국 국민은 그가 내건 깃발을 좇아 전선으로 갔다.
역사상 정당성을 인정받는 전쟁은 타국의 부당한 공격에 맞서는 방위전쟁이다. 뉴욕과 워싱턴의 중추부를 기습당한 미국 국민은 부시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열렬히 지지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일본 한국 등 동맹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 등 대부분 나라들이 미국을 지지했다.
과거 소련군을 좌절시킨 아프간의 전사와 험준한 지형도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에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 전쟁을 통해 미 정부 내 군사적 해결책을 주장하는 강경파 입지가 강화됐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미국은 힘을 요긴하게 써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부시 행정부의 미국을 이라크전쟁으로 내몰았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명분은 이라크가 걸프전 종전 당시의 약속을 어기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으며 이를 테러리스트에게 넘겨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는 화학무기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걸프전 이후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왔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미국이 사찰을 통해 사실 여부를 밝히는 것보다 전쟁을 서두른 것은 진짜 동기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 중동에 친미적인 질서를 재구축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실을 만들어 공격해 이긴 뒤 승자의 질서를 강제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당연시됐다. 그러나 20세기 2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는 침략전쟁을 금하고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준엄하게 묻게 됐다.
국제적 합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이라크 공격을 강행한 미군은 압승에도 불구하고 전후처리로 고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의 정당성 문제가 계속 세계적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 반대한 프랑스와 독일도 더 이상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명목상은 유엔 주도, 실질적으로는 미국 주도하의 이라크 재건을 지지했다.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가 미국의 요청에 호응해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고 일본도 올해 안에 자위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라크는 유엔 결의와 각국 파병에 힘입어 치안이 회복되고 경제재건에 성공할 것인가.
낙관하기는 힘들다. 많은 이라크 국민이 외국군의 존재를 당분간 필요로 한다 해도 소수의 과격파는 외국군 전체를 무찔러야 할 목표로 삼고 있다. 다수의 온건파가 과격파의 테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라크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과격파가 주도권을 잡는 것은 이라크와 국민의 장래를 생각할 때 불행한 일이다.
또 하나의 불행은 북한이 이라크에 주둔 중인 미군의 고전을 보고 자신감을 얻어 핵개발 포기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태다. 이라크 재건의 성공 여부는 그런 점에서 세계정세의 안정을 좌우하는 변수다.
이오키베 마코토 일본 고베대 교수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