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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 의거 80주년 "숨지는 순간에도 육혈포 쏘는 시늉"

입력 | 2003-10-23 18:23:00


‘아침 7시, 찬바람. 눈 쌓인 벌판./ 새로 지은 외딴 집 세 채를 에워싸고/ 두 겹 세 겹 늘어선 왜적의 경관들./ 우리의 의열 김상옥 의사를 노리네./ 슬프다. 우리의 김 의사는/ 양 손에 육혈포를 꽉 잡은 채, 그만-./ 아침 7시. 제비 길을 떠났더이다./ 새봄 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

한국 서양화단의 선구자 구본웅(具本雄·1906∼1953)은 1923년 1월 22일 이른 아침 서울 효제동에서 벌어진 김상옥(金相玉·1890∼1923) 의사와 1000여명에 이르는 일본경찰간의 격전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짤막한 시를 덧붙였다. 당시 경신중학생이던 구 화백은 등굣길에 목격한 이 장면을 잊지 못해 7년 후인 1930년 작품으로 남긴 것이다.

김 의사의 의거 80주년을 맞아 발간된 ‘서울 한복판 항일시가전의 용장 김상옥 의사’(윤우 편저·백산서당)에서는 이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구 화백의 시화(詩畵)와 함께 소개했다. 구 화백의 시화는 1974년 발간된 그의 시화집 ‘허둔기(虛屯記)’에 수록된 것을 편저자인 윤우 광복회 이사가 찾아 공개한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 의사는 3·1운동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서울로 잠입해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했다. 이후 서울에서 일본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니며 총격전을 벌이던 그는 22일 효제동에서 단신으로 일본경찰 1000여명과 대치하며 시가전을 벌이던 중 자신의 총으로 장렬하게 자결했다.

일제는 당시 보도를 철저하게 금지했지만 동아일보는 호외 또는 기사로 1월 12, 14, 17, 18, 22일자에서 김 의사의 활동상을 연이어 보도했고 3월 15일 보도금지가 해제되자마자 ‘계해 벽두의 대사건 진상’이란 호외를 발행해 이 사건을 널리 알렸다. 이 호외는 일본경찰과 맞서다 자결한 김 의사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숨이 진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 쏘는 시늉을 했다….”

동아일보는 김 의사의 사후에도 그의 독립정신을 집요하게 보도했으나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다. 사건 1년 뒤인 1924년 4월 8일자에는 한식(寒食)날 김 의사의 묘소에서 그의 어머니가 통곡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죽으러 왜 왔더냐’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지만 일제가 신문 배포를 금지하는 ‘차압’ 처분을 내려 독자들은 이 기사를 접하지 못했다. 1927년 4월 20일자에는 김 의사 가족이 생활이 어려워 집을 경매처분당하고 거리로 나앉은 사연을 후속 보도했다.

한편 김 의사의 의거 80주년을 맞아 23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김상옥 의사 의거의 역사적 재조명’을 주제로 기념 학술강연회가 열렸다. 발표자인 유준기 총신대 대학원장은 “김 의사의 의거는 3·1독립운동 이후 고조됐던 민족적 의분의 표상이었다”며 “이후 잇달아 일어난 국내외 의열 무력투쟁의 도화선이 됨으로써 항일 의열투쟁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서영훈 ‘김상옥 나석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대한적십자사 총재), 김우전 광복회장, 이옥동 독립동지회장, 이문원 독립기념관장, 여철현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장, 열린 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 박성수 국제평화대 총장,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 김창수 동국대 명예교수,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등 200여명이 참석해 김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렸다.


김상옥 의사의 의거 80주년을 기념해 23일 그의 의거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왼쪽부터 김학준 동아일보사 사장, 이경우 서울북부지청장, 서영훈 대한적십자사총재, 이옥동 독립동지회장, 여철현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장, 김우전 광복회장. -권주훈기자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