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대한 4강 외교에 편중됐던 한국 외교가 동남아시아로 눈길을 돌리며 외교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7, 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한국 중국 일본’ 정상회의와 20, 21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통해 동남아의 다자외교 무대에 데뷔했다.
특히 노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 이어 싱가포르를 방문해 양국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협상 추진에 합의한 것은 동남아 국가와의 양자관계 개선이란 차원에서 주목된다. 이는 우리 외교가 그동안 미국에 치우쳐 온 데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대미 외교 치중은 북한 핵문제의 해결 및 한반도 안정을 위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로 인해 동남아를 비롯한 제3세계와의 외교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중국과 일본이 동남아 국가와 FTA 체결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만 동남아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본격화했다. 중국은 ASEAN 국가들과의 집중적인 정상 및 고위급 방문 외교를 통해 99년부터 2000년 사이에 ASEAN 10개국 전체와 양자차원의 미래 협력을 강조하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96년 150억달러에 불과했던 중국과 ASEAN 국가의 교역규모는 2002년에는 550억달러로 급증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간 교역 규모의 절반에 해당하는 셈이다.
중국의 ASEAN 접근은 중국 남서부지역의 경제성장, 천연자원 확보, 국제질서의 다극화 모색, 국제사회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도 중국이 2001년 11월 ASEAN과 전격적으로 FTA 추진을 합의한 데 충격을 받고 이에 대응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11월 ASEAN과 포괄적 경제 파트너십을 추진하자는 내용의 공동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벌이고 있다.
외교안보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중국의 대ASEAN 접근 강화 동향과 전망’이라는 자료를 통해 “한국이 계속 4강 외교와 북한 핵문제 해결에만 매달려 ASEAN을 등한시할 경우 동아시아 지역협력 과정에서 한국의 외교적 입지는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외교안보연구원은 또 “최근 신정부가 추진하는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 건설 구상에도 ASEAN은 대체로 배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은 앞으로 각종 지역협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ASEAN의 전략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대ASEAN 접근을 강화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현재의 방식처럼 동남아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이뤄지는 동남아 국가들과의 접촉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 당국자는 “ASEAN+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리는 동안 싱가포르 관계자들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 정부가 동남아 국가에 무관심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따라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동남아 국가들과 고위급 인사 교환 및 양자접촉 등을 통해 외교관계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근 대통령의 동남아방문 정상외교 사례△1998년 12월=ASEAN+3 정상회의(베트남)△2000년 11월=인도네시아 국빈 방문△2003년 10월7∼8일=ASEAN+3 정상회의(인도네시아)△1999년 11월=ASEAN+3 정상회의(필리핀)△2000년 11월=APEC 정상회의(브루나이)△2003년 10월20∼21일=APEC 정상회의(태국) △1998년 11월=APEC 정상회의(말레이시아) △2000년 11월=ASEAN+3 정상회의(싱가포르) △2001년 11월=ASEAN+3 정상회의(브루나이)△2003년 10월=싱가포르 국빈 방문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