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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나의 서재]'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

입력 | 2003-10-24 17:37:00

봉준호 감독은 “새 영화 작업에 들어갈 때는 관심사, 느낌, 감각을 해당 주제에 다 열어 놓으려고 노력한다”며 “그런 맥락에서 책은 늘 바탕이자 출발이 된다”고 말했다.권주훈기자 kjh@donga.com


‘살인의 추억’을 만든 봉준호 감독(34)은 요즘 세 번째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 작업에 푹 빠져 있다. 23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그의 시나리오 작업실을 찾았다.

“최근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앗, 그걸 밝히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노출될 텐데…. (잠시 고민) 원서로 ‘Stanley Kubrick:A Visual Analysis’를 보고 있어요. 큐브릭 감독은 테크놀로지의 거장이죠. 세 번째 영화는 기술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자꾸 이 책을 들춰보게 돼요.”

봉 감독은 “아무래도 시나리오를 쓸 때 책을 집중적으로 읽게 된다”며 “평소에 전혀 생각지 않던 책들을 읽게 돼서 오히려 재미있다”고 말했다.

작업실 한쪽 벽면의 절반은 영화 비디오테이프 600여개가 차지하고 있다. 책장에는 ‘참혹한 죽음’ ‘잔혹’ 같은 제목의 책들이 꽂혀 있다. ‘살인의 추억’이 남긴 흔적이다. 촬영 당시의 메모와 각종 음식 국물들로 얼룩진 콘티북도 있었는데, 봉 감독이 모든 콘티를 직접 그렸다고 했다. 일본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浦澤直樹)의 만화 ‘20세기 소년’ ‘몬스터’와 각종 영화잡지 및 수집한 자료들이 책장의 칸칸을 메우고 있는 모습.

그는 일본에서 출간된 빈센트 반 고흐의 화집을 책장에서 뽑아 들더니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을 펼쳐 보였다. ‘살인의 추억’에서 처음과 끝, 노란색 너른 벌판의 이미지는 고흐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실 이 화집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슬쩍’한 것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셨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어린시절부터 ‘아빠 방’에서 영어 일본어 원서로 된 그림책을 마음껏 보며 자랐다고 했다.

화가 임옥상의 책 ‘벽없는 미술관’에는 ‘웅덩이 Ⅰ’이라는 그림에 표시를 해두었다. 황토에 핏물이 고인 웅덩이가 덩그러니 있는 그림 한 장은 ‘한국적 비주얼’이 어떤 느낌인지를 감독에게 일깨워주었다.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중 임철우의 ‘붉은 방’에는 곳곳에 파란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군사독재 시절, 형사가 취조하던 방식의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설명. 19세기 영국의 살인마 ‘칼잡이 잭(Jack The Ripper)’을 그린 만화 ‘프롬 헬(From Hell)’에서는 살인사건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봤다.

만화광으로 잘 알려진 봉 감독은 최근 문화관광부가 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으러간 자리에서 보관문화훈장 서훈대상자인 만화가 길창덕씨를 봤다면서 “지팡이 짚고 시상대에 오르시는 모습에 눈물이 날 뻔했다”고 말했다. “‘꺼벙이’ ‘꺼실이’…. 길 선생님 작품 중에 ‘신판 보물섬’을 제일 좋아해요. 만화는 제게 밥이나 김치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