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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만나는 시]박용래, '下棺'

입력 | 2003-10-24 18:12:00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뒹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시집 '먼 바다(창작과비평사)중에서

가을걷이 끝난 새벽들판을 건너는 들쥐들의 발이 시린 계절이다. 느릿느릿 팔자걸음 걷지 않고 종종 달음박질하는 건 그 때문이다.

천지만물을 묘지로부터 꺼내 놓았던 봄 햇살은 어디로 갔는가? 녹음을 불태우던 여름 뙤약볕은 어디로 갔는가? 수줍게 서산 빗겨 넘는 햇무리가 제가 일으켜 깨운 것들을 도로 묘지에 부리는 하관(下棺).

평생 지고 다니던 집을 놔두고 우렁이는 알몸으로 어디 갔을까? 살얼음길, 배를 밀며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길 떠난 게 틀림없다.

모두 떠나면 누가 남나? 먼 시베리아로부터 첫 기러기 떼 날아온다. 기럭기럭 구성진 호곡(號哭)에 가을 하늘 깊어간다. 논두렁에 발자국만 남기고 들어간 농부는 자꾸만 화롯불 껴안는 계절이다.

반칠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