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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보니]강여규/하이델베르크의 '한글 낙서'

입력 | 2003-10-24 18:21:00


내가 사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는 인구 14만의 대학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은 고장에서도 세계화라는 말을 쉽게 실감할 수 있다. 식품에서부터 최첨단 산업제품까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온갖 상품들이 소비자를 유혹한다.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전자제품, 컴퓨터, 휴대전화 등을 파는 매장에서 한국제품들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제품은 일본에 이어 등장한 소위 후발주자로서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건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품질과 가격에서 훌쩍 등급이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동전화기의 경우 삼성제품은 고가의 고급품으로 팔리고 있으며, 대형 평면이나 액정화면의 텔레비전에서도 한국 제품은 독일의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고급품으로 인정받으며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제는 한국에 이어 중국의 상품들이 여러 분야에서 싼 가격으로 시장을 점령해 가고 있는 현상도 눈에 띈다.

우리가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또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듯이, 한국은 불과 몇 년 전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다시 경제규모 세계 12위라는 경제대국이 되어 있다. 이미 전 세계에는 650만명의 재외동포들이 살고 있으며, 이제는 한국인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밖으로 세계화를 진전시켰다. 그것뿐인가.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도 물리치고 민주적 시민사회로 전환하는 놀라운 성과도 이루었다. 나에게는 이것이 경제적 성장보다 오히려 더 고무적인 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경험하는 한국 관광객들의 모습은 시민사회의 기본예절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후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하이델베르크는 이름난 관광도시의 하나라 20년쯤 살다 보니 관광객들의 성향도 대략 가늠이 되는데, 아무래도 내 관심은 일본과 중국, 한국의 관광객들이다.

일본인들은 단체로 와도 얌전히 종종걸음으로 다니면서 인솔자의 설명을 열심히 듣는 것이 훈련된 모범생들 같다면, 한국인들은 큰 소리로 떠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놓친 행렬을 찾아 뛰기도 하는 것이 버릇없이 자란 청소년들 같다. 중국인들은 단체보다는 대개 4, 5명 규모로 여유 있게 걸으면서 구경보다는 자기들끼리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는 인상이다.

관광객들은 곳곳의 명소에 낙서를 남기기도 하는데, 동양 3국 중에서 한국인들이 낙서를 가장 많이 한다고 소문이 나 있다. 한번은 관광명소인 ‘학생감옥’에 한국어 낙서가 너무 많아 이곳 관리인이 한국 유학생에게 ‘낙서금지’를 한국어로 써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젊은 배낭 여행객이든, 나이 든 단체여행객이든 차분히 탐색을 한다기보다 눈요깃거리에 눈만 맞추고 가는 게 대부분이다. 유럽 8개국을 12일 동안 도는 여정을 치르다 보니 길거리에서 “여기가 어느 나라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여행을 통해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보는 방법도 세련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상품이 질적으로 평가받고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처럼 말이다.

강여규 독일 하리델베르크시 외국인의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