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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홍찬식칼럼]불쌍한 江北의 인재들

입력 | 2003-10-24 18:21:00


미국도 한 가지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있다. 미국 청소년들의 고질적인 학력 저하가 그것이다. 미국은 지난 10년간 선진국들의 학업성취도 비교평가에서 한번도 상위권에 들지 못했다. 교육 환경은 뛰어나지만 학생들이 공부에 별 의욕이 없는 탓이다.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를 내키지 않아 하는 상황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살벌한 미국의 교육개혁 ▼

참다못한 미국 정부는 ‘초강력 처방’을 꺼내 들었다. 지난해 시행에 들어간 미국의 교육개혁 법안이다. ‘한 아이도 뒤처지지 않게(No Child Left Behind)’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법안은 교육현장에 철저한 경쟁논리를 도입한 것이 핵심이다. 법안 내용은 살벌한 느낌마저 든다. 일정한 학력기준을 정해 놓고 미달한 학교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3년 연속으로 기준에 미달하면 그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한다. 물론 학교가 폐쇄되면 교직원들은 해고된다. 평준화 체제 아래의 우리 입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이다. 기준에 미달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언제든 다른 학교로 전학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교육개혁은 미국 이상으로 국민적 관심사이다. 새 정부는 아직 뚜렷한 교육개혁방안을 국민에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교육당국의 움직임을 보면 새 방안이 나오더라도 기존정책에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교육당국은 느긋한 반면 정부 내에서 경제부처나 지방자치단체들이 교육문제에 더 몸이 달아 있다. 집값 파동과 함께 교육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사람들도 더는 참고 기다릴 수 없다는 표정이다. 선진국들이 저마다 교육의 새 틀을 짠다고 난리인데 우리 교육당국만 무슨 배짱으로 여유로운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교육정책은 입시경쟁을 잡는 데 매달려 왔다. ‘발등의 불’이 뜨거워 인재를 키워내는 수월성이나 학업성취도 등 교육 본래의 목표를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교평준화 등 경쟁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이 자리 잡았고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은 당연히 무시됐다. 수십년 동안 미국의 교육개혁과는 정확히 반대방향을 향해 달려온 것이다. 경쟁과 선택권이 사라진 분야에 일이 잘될 리 없다. 교육열이 세계 최고라는 나라가 어느새 인재 부족, 학력 저하를 한탄하는 처지가 됐고 교육의 난맥상이 초래된 것도 상당부분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교평준화정책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자체들은 요즘 지역발전 명목으로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신설 계획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이것은 평준화 측면에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자체 약속대로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가 대폭 늘어나면 평준화는 사실상 원칙만 남게 된다.

경제특구와 제주에는 내국인이 입학할 수 있는 외국학교까지 설립된다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준화정책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현실과 시대변화에 맞지 않은 나머지 자연스럽게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평준화라는 ‘게임의 법칙’은 서울 강남에서는 오래전에 깨졌다. 평준화는 모든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의 질이 똑같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강남은 사교육 여건이 월등할 뿐 아니라 우수학생이 몰려들면서 공교육에서도 경쟁의 상승효과가 두드러지고 있다. 강남 학생들은 스타트 라인에서부터 멀찌감치 앞서 있는 셈이니 강남은 더 이상 평준화원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교육의 리더십 절실하다 ▼

서울 인구 중에서 강남과 강북은 정확히 반반을 차지한다. 얼마 전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강북의 서울대 진학률이 강남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밝혔다. 똑같은 인구의 강남 강북이 이처럼 차이가 날 수 있는가. 문제는 강남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갈 수 없는 가난한 수재들이다.

교육문제의 해법을 놓고 정부나 집단간에 벌이는 소모적인 싸움은 이 땅의 미래에 절망감과 회의를 안겨준다. 교육이민을 결심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교육의 혼돈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역사에 큰 죄를 짓는 일이다. 교육당국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은 교육여건이 다르지만 미국 교육개혁의 결단력, 과감성을 배워야 할 시점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