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 100년 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으로 꼽히는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가 23일 밤 11시17분 미국 뉴욕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6세.
쑹 여사의 일생은 그동안 논픽션 드라마로 널리 소개됐을 만큼 격동기 중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파란만장한 궤적을 그려 왔다.
“아이링(靄齡)은 돈을 사랑했고, 칭링(慶齡)은 조국을 사랑했으며, 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했다.”
그를 포함한 세 자매의 소설 같은 삶을 묘사하는 데 늘 등장하는 말이다.
1927년 중국 난창의 자택 정원에서 장제스 총통과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신혼의 쑹메이링(오른쪽). 왼쪽은 1997년 미국 뉴욕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쑹 여사. -로이터·AP 자료사진
쑹 여사의 큰언니 아이링의 남편은 중화민국(대만) 초대 재정부장이었던 쿵샹시(孔祥熙)였고, 둘째언니 칭링의 남편은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조(淸朝)를 무너뜨린 쑨원(孫文)이었으며, 메이링은 장제스와 결혼해 권력을 움켜쥐었던 것. 오빠 쑹쯔원(宋子文)도 중화민국 재정부장을 지냈다.
쑹 여사는 1897년 상하이(上海)의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언니들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17년 매사추세츠주 웰즐리 여대를 졸업했다. 그 뒤 27년 12월 1일 국민당 우파였던 장제스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당시 장제스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나 쑹 여사와 재혼하려고 조강지처와 이혼했다. 장제스를 극도로 싫어하고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둘째언니 칭링과는 평생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쑹 여사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국공(國共)내전이 한창이던 1936년 12월 동북 군벌인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를 감금했던 시안(西安)사변이 터지자 홀로 시안으로 달려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담판해 남편을 구해내기도 했다.
쑹 여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미국 의회에서 중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등 대미 외교를 전담했다. 당시 시사주간 타임은 “‘아시아의 퍼스트레이디’ 쑹 여사가 뛰어난 영어 실력과 미모, 세련된 매너로 의회를 사로잡았다”고 보도했고, 이후 타임지 사주인 헨리 루스는 장제스 정권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가 참석한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때는 영어를 못하는 장제스를 위해 통역을 맡기도 했다.
1975년 4월 장제스가 사망하자 쑹 여사는 그해 9월 뉴욕으로 건너간 뒤 가끔 대만을 방문했을 뿐 줄곧 칩거생활을 해 왔다. 그의 도미는 장제스의 첫 부인이 낳은 장징궈(蔣經國) 전 대만 총통과의 권력 갈등 때문이었다.
쑹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와준 공로로 1960년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아 우리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쑨원, 장제스도 이 훈장을 받았다.베이징=황유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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