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이 눈으로 떠돌때 내 가슴속 상처-고통도 세상과 하나 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어느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눈의 여행자/윤대녕 지음/280쪽 9000원 중앙M&B
소설가 윤대녕씨(41)가 최근 장편소설 ‘눈의 여행자’를 펴냈다.
그는 올 1월 한 달 동안 밤낮으로 눈이 퍼붓는 일본 동북부지역을 여행했다. 소설 속 주인공 ‘나’의 여정은 날짜, 묵었던 호텔, 거리의 풍경까지 작가 자신의 것과 동일하다.
주인공 ‘나’는 계약한 원고의 마감 시한을 1년이나 넘기고도 글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 어느 날 ‘나’는 일본에서 온 항공우편물을 건네받는다. 어린이용 숫자놀이 책과 한 통의 편지.
발신인인 ‘박양숙’이란 이름의 재일 한국인은 편지에서 자신을 ‘나’의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라고 소개하며 소설가가 언젠가 눈(雪)에 관한 작품을 쓰겠다고 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여인은 눈 내리는 밤이면 텔레비전 속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 급기야 아이 울음소리를 따라 떠나게 됐다며 소설가라면 아이를 찾을 수도 있을 듯도 싶어 편지를 보낸다고 밝힌다.
숫자놀이 책에는 여인이 보름 동안 눈을 따라다닌 여행메모가 기록돼 있고 ‘나’는 일본으로 떠나 그곳을 차례대로 찾는다.
눈 속으로의 여행길에는 ‘나’와 외사촌누이,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 ‘수(秀)’의 이야기가 갈마든다. 메모를 따라 가면서 ‘나’는 연락을 끊어버린 외사촌누이와 아들에게 전화를 걸지만 받지 않는다. 또 ‘나’ 역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 낯선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고 이를 통해 편지 속에 언급된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박양숙’의 정체는 알고 보니 소설가가 일본 여행을 시작할 무렵 스치듯 만났던 여인. 아이를 잃은 뒤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이었다. 한편 일본을 떠나기 직전 외사촌누이에게서 연락이 오고 ‘나’는 호텔에서 아들을 다시 만난다. 아이는 헤어지면서 말한다.
“나 아저씨 누군지 알 것 같아.”
‘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하게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느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233쪽)
작가는 눈을 소재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8년 전, 타클라마칸사막 여행에서 우연히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나는 실크로드를 여행 중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사막에 내리는 눈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막에서, 그것은 신기루와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모래와 눈. 그토록 이질적인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겹치면서 그 부산한 틈새에서 머나먼 미지의 외침이 들려왔다.’ (‘작가후기’ 중)
올봄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작가는 23일 전화통화에서 문예지 겨울호에 실을 원고를 쓰고 있다고 했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지금까지는 잘 내려왔다는 생각입니다. 몸도 좋아지고. 도시에 있으면 생기는 허영심을 버리고 있는 중이지요. 이번 소설 역시 야심작이라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한동안 자연이 주는 ‘무(無)’의 이미지에 들려 있었고 그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할까….”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