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김영일 전 사무총장이 26일 지난해 대선 비자금 문제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두 눈을 감은 채 착잡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다. -서영수기자
“당시 후보는 자금의 모금과 집행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한나라당 김영일(金榮馹) 전 사무총장은 26일 기자회견 도중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와 당에 유입된 SK비자금 100억원과의 관련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당 안팎에선 당시 김 전 총장이 이 전 총재에게 주요 사안을 직보할 만큼 가까웠기 때문에 이 전 총재가 SK비자금의 당 유입을 과연 몰랐겠느냐는 의문도 적지 않다.
또 일각에선 지난해 10월경 당 일부 중진이 기업별 후원금 모금 분담을 위한 회의를 가졌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 SK 외에 다른 기업의 비자금도 유입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기자회견 사전 협의 가능성=이 전 총재는 25일 차남 수연(秀淵)씨의 결혼식이 끝난 뒤 SK비자금과 관련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 전 총장은 이 전 총재가 귀국한 20일 이 전 총재의 옥인동 자택을 방문해 10여분간 머물렀다. 그 뒤에 두 사람이 따로 만난 적은 없다는 게 이 전 총재 측근의 전언이다.
그러나 이 전 총재 주변에선 “김 전 총장이 ‘총대를 메고’ 나서지 않고 있어 이 전 총재가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많이 나왔고, 이 전 총재의 일부 측근은 이 같은 분위기를 김 전 총장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대선 당시 이 전 총재의 특보를 지낸 한 인사는 25일 기자와 만나 “당연히 대선자금을 총괄한 김 전 총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김 전 총장이 빨리 나서지 않으면 당과 이 전 총재 모두 어려워진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SK 비자금 모금 주체 논란=김 전 총장은 기자회견에서 “자금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SK 비자금 유입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모금 과정에서부터의 개입 의혹은 차단했다.
그러나 당 안팎에선 지난해 대선 당시 김 전 총장을 포함한 당 중진들이 가까운 사이인 각 기업 소유주들을 나눠 맡아 모금에 나섰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김 전 총장은 이와 관련해 “당시 후원금을 더 낼 수 있을 만한 기업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회의는 있었지만 이 회의에서 불법자금 모금을 위한 역할 분담을 한 것은 아니다”고 부인했다.
또 당시 당 후원회장이던 나오연(羅午淵) 의원도 “당 후원회를 앞둔 대책회의에서는 공식 후원금 모금 문제만 논의했다”며 SK비자금과 대책회의가 무관함을 강조했다.
문제는 100억원을 SK측에서 받아 당에 전달했다는 최돈웅(崔燉雄) 의원과 이 전 총재의 관계. 두 사람은 경기고 동기이며 최 의원은 2001년 10월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받아 당선되는 과정에서 이 전 총재의 도움을 결정적으로 받았다.
최 의원은 본보 취재진에 “당에서 선거자금이 부족하다고 해서 SK측을 독촉했다”고 털어놓았다. 따라서 최 의원이 ‘독촉’까지 해 가며 100억원이라는 거액을 받은 사실을 사후에라도 이 전 총재에게 밝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당 내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이 전 총재는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돈 문제와 연관되는 것을 병적으로 거부했다”며 “누구도 돈 얘기를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이 전 총재의 사후 인지 여부=김 전 총장이 자금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SK 비자금 유입 사실을 이 전 총재에게 보고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김 전 총장과 이 전 총재측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만약 이 전 후보가 SK비자금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면 20일 귀국 당시 인천국제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