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먹고 살기가 편해진 사람이 많은지, 힘들어진 사람이 많은지 국민투표 한번 해 보자. 개인과 기업을 통틀어 전자가 많으면 대통령 재신임, 후자가 많으면 불신임으로 친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할 생각이 있을까.
보통 생활인의 안녕과 불안을 가르는 1차 문제는 먹고사는 일이다. 어떤 정치도, 권력도, 정부도 이에 대한 희망을 못 준다면 국민에겐 혹 같은 존재일 뿐이다. 2003년은 우리 경제에 잃어버린 한 해가 되고 말 것인가. 1년의 허송과 표류가 몇 년을 더 힘들게 할까.
▼경제는 꿈속에서 살리나 ▼
노 대통령은 대선 승리 8개월이 지나고 취임 반년이 되던 8월 25일 경제살리기의 ‘액션 플랜’에 대해 말했다. “구체적인 것은 아직 안 나왔지만 문민정부도 10월에야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참여정부가 제시한 내용이 훨씬 다양하고 풍부하다.”
풍부한 내용이 뭔지 나만 모르고 있나 의아했다. 그로부터도 두 달이 흘렀고, 어느덧 11월에 접어든다.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은 9월 6일 비서실 특강을 했다. “어느 국회의원이 참여정부는 말만 하고 행동은 없는 나토(NATO·노 액션, 토킹 온리) 정부라 했다지만 로드맵 퍼스트, 액션 레이터(먼저 청사진 만들고 다음에 실천하는) 정부라 할 수 있다. 로드맵과 매뉴얼로 작성된 개혁 프로그램이 250개나 된다.”
그 많은 로드맵은 언제 국민을 신나게 해 주려나. 뜸 들이는 사이에 경제는 숨넘어간다고 사방에서 아우성이다. 제대로 뜸이나 드는 건가.
9월 9일 추석 메시지에서 노 대통령은 “정부부터 모든 역량을 경제회복에 집중하겠다”면서 “국민 여러분이 걱정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갈 것이며 무엇보다 서민과 중산층의 생활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했다. 며칠 뒤 태풍 매미 속에서 대통령은 뮤지컬 관람으로, 경제부총리는 제주도 골프로 뉴스를 만들었다. 그건 그렇고 ‘모든 역량을 경제회복에 집중하는 정부’가 내 눈에만 안 보이나.
이달 중순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경제정책 리더십이 안 보인다는 기자에게 답했다. “과거 재정경제원이 금융, 세제, 예산, 공정거래 등 모든 정책수단을 가지고 있을 때는 조직에 의해서 조율이나 정책 추진이 잘 됐다. 그러나 지금의 재정경제부는 세제기능과 금융에 관한 입법기능만 가지고 있다.”
정부 경제팀장의 리더십 부재를 인정하면서 변명하는 딱한 얘기다. 김대중 정부 때도 오늘과 같은 경제부처 체계였다. 그래도 그 5년간의 재경부 장관이던 이규성, 강봉균, 이헌재, 진념, 전윤철의 정책 리더십은 요즘처럼 실종되지 않았다. 이들은 나름의 실력과 권위로, 때로는 대통령의 힘을 받아 정책 혼선을 정리했다.
최근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20년 전의 대통령경제수석 김재익을 기리는 글을 썼다. ‘지금 정치는 싸움판이고, 노조는 타협보다 투쟁을 내세우며, 기업은 실의에 빠져 있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뚜렷한 리더십까지 없으니 공무원들은 방황을 거듭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김재익을 생각하게 된다. 그지없이 겸손하지만 윗사람에게 구김 없이 직언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파묻혔으며, 부정이란 티끌만큼도 몰랐던 김재익 같은 공직자가 지금 청와대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려진 물처럼 떠내려가는 민생 ▼
노 대통령은 지난주 동남아 순방 때 태국 동포들 앞에서 “한국의 정치 경제 모든 것이 선거 한 번 치르고 대통령 한 명 바뀐 것으로 흔들릴 만큼 허약하지 않다”고 했다. 같은 시간 세계적 컨설팅회사 매킨지는 한국경제의 추락위기를 경고했다.
‘한국은 국가 경쟁력이 크게 위축돼 경쟁국들에 자리를 내주고 산업공동화(空洞化)와 두뇌유출 등의 문제에 직면했다. 앞으로 10년간의 장래성도 중국 싱가포르 인도 대만에 떨어진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서울이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도쿄 등과 비교해 최하위다. 정치시스템이 붕괴되고 과도한 규제가 여전하며 정책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노사관계 현대화, 자본시장 발전, 교육 및 정부 개혁 등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경쟁국에 뒤지는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아 그래? 하지만 나부터 살아야지. 한나라당도, 대통령도 바쁘다.
위기불감증이 가장 큰 위기다. 경제와 민생은 버려진 물처럼 하류로 떠내려갈 운명인가.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