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1년 전 일이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만찬석상에서 그만 토하면서 쓰러졌다.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은 세계 유수의 신문에 1면 톱으로 장식됐다. 일본과의 무역적자 문제에 시달리던 부시 대통령이 일본에 애걸하러 왔다가 그만 지쳐 쓰러졌다는 식의 가십성 해설이 붙었다. 이 사진은 쇠퇴하는 미국과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일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문제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가 소니 회장과 함께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을 내며 미국에 한 수 가르치던 때였다. 그런데 10년도 지나지 않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이 남미의 개도국에서나 보던 10년 이상의 장기 경제침체에 빠져 세계경제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반면, 일본에 ‘역전’당했다던 미국은 인류 역사 이래 가장 강력한 패권국가로 재등장한 것이다.
요즘의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전과 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여진다. 어떤 선진국도 경험한 적이 없는 최장의 경제침체를 겪고 있으며, 국민은 비전이 없는 가운데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버블경제 붕괴가 초래한 자산 디플레이션으로 1990∼97년 사이만 해도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년치에 해당하는 약 11조달러의 자산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회 분위기도 90년대 초의 이상적이고 낙관적 분위기에서 반전돼 매우 냉혹한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 사이에 좌절의 탈출구로서 민족주의 의식이 확산되고 있으며, 정치권도 이를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일본 정치인들의 잇단 ‘망언’들은 일본의 정치경제에 대한 자신감 상실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있다. 즉 과거를 미화하고 일본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우월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감 부족을 감추려 하는 것이다. 활력을 잃은 일본 사회에 국수주의적 접근을 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창출하려는 의도다.
이렇게 본다면 이시하라 도지사를 비롯한 일본정치인들의 망언은 ‘오죽했으면’ 하는 측은한 생각마저 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19세기 중엽 서구 제국주의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동양의 3국은 비슷한 수준의 전근대적 봉건국가들이었다. 그런데 불과 반세기 만에 중국과 조선이 철저히 실패한 반면, 일본은 성공적으로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했다. 심지어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정도로 실패했다. 일본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고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다.
그러나 과연 일본은 현재 이웃국가들에 우월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남을 말하기 전에 자신들을 직시해야 할 것 같다. 역사는 돌고 돈다. 이시하라 도지사가 특히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은 10년 전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하며 미국을 깔보던 호연지기를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저 연일 ‘중국·북한 때리기’에 열중하고 이웃에 대한 우월감과 인종차별적 발언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있다. 그러한 자가 일본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정치가라면, 일본에 이웃은 필요 없다는 얘기인가.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