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궁도의 종가인 서울 종로구 사직동 황학정에서 활을 쏘고 있는 서울시민들. ‘습사무언’(習射無言·활쏘기를 익힐 때는 말을 하지 않는다)이란 말처럼 활을 쏘는 동안엔 침묵과 긴장감이 흐른다. -김미옥기자
지난달 30일 오후 4시경 서울 종로구 사직동 인왕산 기슭의 국궁장(國弓場·활터) 황학정(黃鶴亭).
허리춤에 화살을 차고 손에 활을 든 10여명이 질서정연하게 사대(射臺)에 줄지어 섰다. 그리곤 사대 바로 앞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고 새겨진 표석을 응시했다. ‘활을 배울 때, 말을 하지 말라’는 뜻. 침묵이 흘렀다.
145m 떨어진 과녁을 향해 차례대로 시위를 당겼다. ‘탁, 타닥.’ 잠시 후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다. 과녁을 맞힌 이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들은 한 순(巡·한 순은 5발)을 쏘고 사대를 내려왔고 그렇게 열 순을 반복했다.
1898년 대한제국 때 고종의 어명으로 창건된 황학정. 고종이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모습이 노란 학(황학)이 춤추는 것 같다고 해서 황학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 활쏘기가 쇠퇴하고 일제강점기 활쏘기를 금지했던 상황에서도 황학정만은 그 맥을 이어갔다.
한국 궁도의 종가(宗家)인 황학정을 중심으로 최근 국궁 열기가 살아나고 있다. 황학정에서는 올봄 처음으로 전국 활백일장이 열렸다.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매일 20∼30여명에서 50여명으로 늘었다. 황학정 회원인 사원(射員)도 110명을 넘어섰다. 회원은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황학정에서 활 쏘는 사람 가운데 특히 명사들이 많다. 황학정의 대표격인 사두(射頭)를 맡고 있는 이동희 전 서울산업대 총장을 비롯해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서울대 교수 출신인 김여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강홍빈 서울시립대 교수, 김인회 전 연세대 교수, 박진 한나라당 의원, 김영훈 글로벌에너지네트워크 회장 등.
국궁 열기는 황학정에 그치지 않는다. 노원구 상계4동의 수락정(水洛亭), 중구 장충2동의 석호정(石虎亭) 등 서울 시내 국궁장 10여곳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최근 들어 각종 전통문화행사에도 활쏘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기 시흥 안산 용인 포천 등 수도권 곳곳에서도 국궁장이 잇달아 문을 열고 있다.
국궁의 매력에 대해 활 쏘는 사람들은 단연 정신수양과 건강을 꼽는다. 하지만 매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양궁 경력 28년, 국궁 경력 14년의 이한웅씨(57)는 “조준경이 달려있는 양궁은 너무 기계적이지만 국궁은 눈과 마음으로 활을 쏘면서 자연과 일체가 된다”고 예찬했다.
황학정의 이동희 사두는 여기에 또 다른 매력을 덧붙였다.
“국궁은 정신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지적인 운동입니다. 명사들이 많이 찾는 것도 이 때문이죠. 또 있습니다. 양궁은 직선으로 날아가지만 국궁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갑니다. 그 곡선의 아름다움이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