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륙도’에서 ‘사오정’을 지나 ‘삼팔선’까지….
대기업에 다니는 A씨(36)는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업무가 비슷한 2개의 부서를 합치는 조직개편 과정에서 영업 외근을 뛰던 자신이 내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알아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잘해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한 A씨지만 주눅이 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정신과를 찾은 A씨는 의사와의 대화를 통해 불면증의 원인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여행사 직원인 B씨(32)도 비슷한 케이스. 올 초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여행업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자 언제 감원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무기력증이 찾아온 것.
B씨는 견디다 못해 결국 8월에 병원을 찾았고,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해 오고 있다.
30대 남자 회사원들 사이에 이 같은 ‘감원공포증’이 급속히 번지고 있다. 최근 경기 악화로 ‘체감정년’이 30대 중반으로 내려가면서 30대 중후반 회사원들 사이에서 고용불안에 대한 공포가 늘고 있는 것.
▽‘38선’의 실태=‘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도둑’(오륙도)에서 ‘45세에 정년퇴직’(사오정)을 지나 ‘38세도 선선히 퇴직을 받아들인다’(삼팔선)까지 정년의 나이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체감정년을 정상 체온에 빗대어 ‘36.5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헤드헌팅 포털사이트인 ‘커리어센터’가 직장인 79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7.3%가 감원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한국노동연구원에서는 지난달 말 임금근로자의 평균 퇴출연령이 35세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증가하는 정신과 상담=이에 따라 병원을 찾는 30대 회사원이 늘어나고 있다.
스트레스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인제대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는 감원공포증을 호소한 환자가 지난해 11%에서 올해 10월 현재 19%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병원측은 “지난해와 뚜렷이 다른 점은 예전에는 40, 50대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 새로 클리닉을 찾는 환자는 대부분이 30대 중·후반이라는 점”이라고 밝혔다.
서울 강남에서 대인관계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양창순(楊昌順·신경정신과 전문의) 박사는 “감원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30∼40% 증가한 것 같다”며 “다른 이유로 병원을 찾더라도 감원에 대한 공포가 이미 내재돼 있는 환자가 많다”고 말했다.
감원공포 등 사회로부터 배제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인간의 두뇌는 마치 심하게 무릎이 까졌을 때나 정강이를 차였을 때와 비슷한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지난달 10일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되기도 했다.
심할 경우 불면증이나 불안증으로 시작된 감원공포가 공황장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서울백병원 우종민(禹鍾敏) 교수는 “앞으로는 회사에 남아 감원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 느끼는 비관과 불확실성이 더 큰 문제”라며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어진 지금은 개인도 경력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고 기업도 투명성을 유지해 감원에 대한 공포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