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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만나는 시]김왕노, '사칭'

입력 | 2003-11-02 18:53:00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

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

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

그러나 내일이 오면 나는 그 무엇을 또 사칭해야 한다

슬프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이 빤한 방법 앞에 머리 조아리며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천년의 시작)중에서

당신 깃든 사원에 발 벗고 함께 머리 조아리나니 나는 사람을 만나도 짐승을 못 버렸고, 꽃을 만나도 벌거지를 못 면했으며, 바람을 만나도 꿈꿀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당신의 기도가 오히려 나를 울립니다.

사칭이라니요, 사람을 만나 사람이 되고 꽃을 만나 꽃이 되려 했다면. 진실로 바람을 만나 바람이 되고 죽음을 만나 죽음이 되려 했다면.

누구나 자신이 오를 저 높은 정신의 설산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이 있으리요만 그래도 위안을 갖는 것은 머리 조아리는 이는 이미 가면을 벗었기 때문 아닌가요. 사원을 나서면, 구원의 약속보다 반성의 힘으로 가뿐해지는 것.

일어나세요. 살다보면 또 다시 사칭할 날도 오겠지요. 많이는 말고 병아리 눈꼽만큼만 사칭하고, 주먹같이 반성하며 살자고요. 세상의 제왕을 참칭(僭稱)하지는 말고 슬프게 조금씩만 사칭하며 살자고요. 그럼 각자 죄 짓고 사원에서 다시 만나요.

반칠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