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하이에크가 낳고 김대중 정부가 키웠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폰 하이에크(1899∼1992)에게서 시장에 대한 믿음을 배웠고, 김대중 정부의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99년 결성된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와 2000년 출범한 자유기업원.
“시장의 햇볕을 쬐지 않는 곳에 부패와 비효율이 곰팡이처럼 피어난다. 시장은 선이고 정부는 악이다. 제3의 길은 없다.”(김영용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하이에크의 후예들=자유기업원의 전신(前身)은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에 개설된 자유기업센터다. ‘재벌의 앞잡이’란 비난을 의식해 2000년 2월 비영리 연구소로 독립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며 하이에크 사상에 심취해있던 공병호 초대 원장과 김정호 현 원장은 그즈음 터진 기아사태와 소액주주운동을 보며 시장을 대변할 연구기관을 떠올렸다. 모델이 된 것은 미국 헤리티지 재단과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IEA)로 각각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연구기관들이다.
정규 직원이 10명뿐인 자유기업원의 대외활동은 홈페이지(www.cfe.org)와 e메일을 통해 이뤄진다. 외부 전문가 집단을 활용해 정부 정책을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해 홈페이지에 올리며 ‘한국사회 여론 주도층’인 3만명의 e메일 회원들에게 글을 보내 자신들의 생각을 알린다.
자유기업원과 별개의 조직이지만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는 파트너 지식인 그룹이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이 단체도 ‘자유사회의 길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기반으로 1999년 10월 출범했다. 출범 당시 회원은 강위석 월간 에머지 전 편집인,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김한응 전 금융연수원 부원장, 김이석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 민경국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학과 교수 등. 현재 이들을 포함해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 민병균 자유기업원 상임고문, 안재욱 경희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조영일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 등 6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하이에크의 철학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1940년대에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실패한다. 개인의 자유와 시장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며 사실상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재생인 신자유주의를 주창했다.
▽시장으로 해결하라=자유기업원과 하이에크소사이어티는 하이에크가 1950년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밀턴 프리드먼 등과 함께 만든 미국 시카고학파의 이론에서 실천적 처방을 찾아왔다. 이들이 주장해 온 민영화, 규제개혁, 작은 정부, 연금개혁,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은 이 학파의 이론에서 비롯된 것. 지난달 24일 하이에크소사이어티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지 않으면 한국 경제는 미국 경제처럼 성장하다가 일본 경제처럼 추락하고 독일 경제처럼 망할 것이다.”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원들은 자유기업원의 홈페이지를 통해 정부가 최근 부동산 대책의 하나로 검토 중인 ‘토지 공개념’ 제도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토지 공개념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은 규제 때문에 높아진 부동산값을 또 다른 규제로 잡겠다는 발상이라는 것.
자유기업원은 지난해 말 출간한 ‘정책제안1’에서 △재벌규제책과 법인세 폐지 △은행 소유 자유화 △그린벨트, 수도권 집중 억제책, 재건축 규제 등의 폐지를 경제정책으로 제안했다. 이 밖에 농업 개방, 중고교와 대학 민영화, 영어 공용화, 스크린쿼터제 폐지 등 사회 전 분야에 ‘개방과 경쟁’의 원리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학계의 중심에 도전=하이에크소사이어티의 당면 목표는 학계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김 회장은 “1960년대 미국의 시카고학파가 하버드와 예일 등 이스턴 서클의 정부개입주의자들과 치열한 논쟁 끝에 승리를 거둔 뒤 레이건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됐다”며 “내년 2월 한국경제학회가 주최하는 ‘경제학 공동 학술대회’ 참가를 시작으로 학계 논쟁의 중심에 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유기업원도 올 가을학기부터 연 8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경희대 단국대 명지대 등 전국 8개 대학에 ‘시장경제’ 강의를 개설했다. 386 세대에서 대가 끊겨 회원들이 노령화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제3회 자유주의 정책 심포지엄’에 참석한 자유기업원과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민병균 자유기업원 상임고문, 강위석 전 에머지 편집인,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 김한응 전 금융연수원 부원장,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소설가 복거일씨. 뒷줄 왼쪽부터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학과 교수, 전용덕 대구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김영용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김정호 자유기업원장, 안성포 단국대 법학과 교수, 정기화 전남대 법학과 교수,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 김이석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민경국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양금승 전경련 시장경제팀장, 배진영 인제대 경제학과 교수,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장, 안재욱 경희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김미옥기자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복거일…공병호…대표적 논객 ▼
자유기업원과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의 대표적 논객은 소설가 복거일씨(58)와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43)이다.
공 소장은 2000년 개인과 기업 후원자 450명으로부터 120억원의 기금을 거두어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자유기업원을 독립시켜 나갔다. “공 소장이 아니었으면 현재의 자유기업원도 없었다”는 것이 현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의 말이다.
“청와대에서 만류하는 압력이 들어와 도청을 피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2, 3개 들고 다니며 기금모금을 했다. 한국은 어려워진다, 사상적 기반이 취약해 비즈니스하기 힘들다고 설득했더니 침묵하는 다수가 주머니를 열었다.”
공 소장이 자유주의에 입문한 것은 1987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라이스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1990년대 초반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과 산업연구실장을 거치면서였다. 당시 그는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을 읽고 시장경제에 대해 막연히 가져왔던 신념을 굳혔다. 그 후 그는 하이에크의 주요 저서인 ‘법 입법 그리고 자유’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등을 번역해냈다.
공 소장은 2001년 자유기업원을 그만두고 개인 브랜드를 내건 연구소를 설립해 ‘1인 기업가’를 실험 중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최종 단계가 자조(自助)론”이라며 자유기업원을 떠났지만 자유주의적 사회활동은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복씨는 하이에크소사이어티의 회원으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를 내온 보수 논객. 공 소장은 그에 대해 “재벌의 앞잡이라는 비난 속에 외로운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 복 선생은 큰 정신적 버팀목이 됐다”고 말했다.
복씨의 자유주의 입문을 도운 것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였다. 대학 시절 마르크스 경제학을 접하며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정도로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신념을 확고히 한 데는 진화론을 비롯한 생물학적 지식도 한몫했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논거도 그것이 사회주의 단계에서 진화가 멈춘, 반(反)진화적인 이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