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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정유업계 환리스크 무방비

입력 | 2003-11-03 17:44:00


“1년동안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환차손으로 모두 날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환율 때문에 회사가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현대오일뱅크의 서영태(徐泳泰) 사장은 정유회사 근무경험이 전혀 없는 뱅커 출신이다. 그렇지만 환율변동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국 정유업계의 오랜 관행을 바꿔나가고 있다.

서 사장은 ‘최고경영자(CEO)의 마인드가 기업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경영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외국에서 원유를 수입해 이를 휘발유 등·경유 벙커C유 등으로 가공하기 때문에 수입대금을 달러화로 지급한다. 따라서 원-달러 환율변동에 아주 민감하고 이것 때문에 순이익이 큰 폭으로 늘거나 줄어든다. 그러나 국내 정유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환위험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석유가격을 올려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현대, 목표는 100% 헤지=서 사장은 체이스맨해튼 부지점장과 옛 살로먼스미스바니(SSB) 상무, 두산씨그램 재무담당임원(CFO)을 지내고 2001년말 현대오일뱅크 CFO로 합류했다. 그는 이때 황당한 사실을 발견했다.

2000년 영업이익은 1735억원, 환차손은 1532억원으로 환율변동 때문에 일년간 열심히 영업해서 번 돈을 모두 까먹었던 것. 2001년에도 영업이익은 117억원 적자였으나 환차손이 896억원이나 됐다. 환위험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것.

경쟁사에 비해 영업력에서 밀리고 이자비용도 많아 어려운 판국에 어마어마한 환차손이 발생해 회사가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서 사장은 부임과 동시에 리스크관리위원회를 만들어 환차손 관리에 들어갔다.

원유수입에 따른 현대오일뱅크의 외화부채는 약 8억달러 수준. 원-달러 환율이 10원만 올라가도 80억원 손해본다.

서 사장은 선물환(Forward) 매매를 통해 환위험을 없앴다. 예를 들어 원유를 살 때 환율이 1달러에 1200원이었고 3개월후에 대금을 줘야 한다면 ‘3개월만기 1달러=1200원’의 선물을 사는 방식이다.

올초 외환시장이 크게 출렁거렸을 때는 헤지 비율을 90%까지 높였고 요즘에는 시장이 안정돼 30%로 낮췄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2002년엔 영업이익 1416억원, 환차손 163억원(헤지 비용 포함), 순이익 503억원을 기록했다. 환위험관리는 기업이 환율변동으로 인한 이익 또는 손해를 입는 것을 없애는데 목적이 있어 선물환을 사는 헤지 비용 만큼의 손실이 나면 아주 이상적이다.

올 상반기(1∼6월) 실적은 더욱 좋아져 영업이익 1306억원, 환차손 98억원, 순이익 835억원이다. 손익위주 영업과 비용절감으로 영업이익을 내고 환차손을 줄이면 순이익은 올라가고 실적 또한 환율변동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정유사는 왜 안할까=국내 정유사의 순외화채부채는 △SK㈜ 15억달러 △LG-칼텍스정유 13억달러 △에쓰오일 6억5000만달러 등이다. 이 금액만큼 환율변동 리스크에 노출돼있지만 이들은 헤지에 아주 소극적이다. 그 결과 이들은 2002년에 1600억∼2000억원의 환차익을 봤지만 2000년, 2001년 수천억원의 환차손을 봤다. 환율 때문에 회사가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 하는 것.

SK는 작년까지 파생상품거래를 통한 헤지를 거의 하지 않다가 올 상반기 소규모 헤지를 시작했다. 에쓰오일은 외화부채를 2001년 20억달러에서 최근 10억5000만달러를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정유사들은 헤지를 하지 않는 이유로 원-달러 선물환시장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과 헤지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을 내세운다. 원-달러 선물환 시장이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 헤지 비용은 설득력이 약하다. 1달러를 한 달동안 헤지하기 위해서는 약 3원의 거래비용이 들어간다. SK가 15억달러를 100% 헤징하려면 연간 540억원이 필요하다. 헤지 비율을 30%로 잡으면 연간 162억원 정도다.

실제로는 환차익이 생기면 정유사가 챙기게 되고, 환차손이 발생하면 제품가격을 올려 소비자에게 떠넘겨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