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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8월의저편 458…잃어버린 계절(14)

입력 | 2003-11-03 18:15:00


1945년 8월 15일, 밀양의 사명당비가 땀을 흘렸다. 옥음방송이 흘러나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는 함성이 메아리쳤다. 일본인 산파 기와는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조선에서의 생활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우근에게 작별을 고한다. 한편 중국에 있던 나미코는 전단을 보고 전쟁이 끝난 것을 알고, 혼자 힘으로 조선으로 돌아간다.

나미코는 선실에서 울려퍼지는 애국가 소리를 들으면서 납처럼 무거운 몸과 마음을 끌고 갑판 위를 걸었다. 사람이 많아 공기가 탁한데도, 많은 사람과 기쁨을 나누고 싶어 갑판 위로 올라오지 않는 것이리라. 바닷바람에 들쭉날쭉한 나미코의 머리칼이 나부끼고, 치맛자락이 불길처럼 펄럭인다. 8월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바다 위는 벌써 춥다. 추워서 온 얼굴이 얼얼하다. 주먹으로 힘껏 얻어맞은 것처럼. 여보하고 개는 두드려 패야지, 안 그러면 말을 안 듣는다니까! 여보 주제에 건방 떨지 마! 아버지에게 툭하면 얻어맞았다. 얻어맞지 않은 날이 적을 정도로. 오른쪽 귀는 휭 휭 부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데, 왼쪽 귀는 잠잠하다. 저, 낙원에서의 첫날 밤, 군의를 깨물고 밖으로 도망쳤을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버지에게 얻어맞았다. 그때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고막이 터졌는지도 모르겠다. 조센진 주제에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더러운 여보 자식! 여보! 여보!

아침이 되면 모두들 갑판으로 나오겠지, 부산항을 보기 위해서…그리고 아침 햇살 속에서 애국가를 부르겠지…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과연 나도 같이 노래를 부를까?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왜 살아 있지? 살고 싶은 건가? 살아서 뭘 어쩌는데? 나미코는 바다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자기 목소리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쪽에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또 오세요 나미코는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어서 오세요 그쪽에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또 오세요.

갑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제일 후미로 돌아오자 아까 나미코가 서 있었던 자리에 남자가 서 있었다. 나미코가 그랬던 것처럼 난간을 잡고, 어둠 속에서 하얀 파도를 응시하고 있다. 큰 키…6척 가까이 되지 않을까….

사람의 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구니모토 우테쓰, 이우철.

글 유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