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정책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시장개혁 로드맵이 최근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핵심은 대기업 총수의 영향력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쥐꼬리만 한 지분밖에 없는 총수들이 그 이상의 지배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출자총액제한 졸업 기준을 부채비율이 아닌 총수의 실제 지분과 지배권간의 괴리를 반영한 ‘의결권 승수’로 바꾸겠다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기본구상이다.
로드맵의 기저에는 총수 지분과 지배권간의 괴리가 큰 기업일수록 지배구조가 나쁜 기업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그러나 지분과 경영권은 일치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의결권 승수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적절한 잣대가 아닐 수 있다. 신설 기업이 아닌 한 소유구조는 치밀한 계산과 계획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변적 시장 환경에서 오랜 기간에 걸친 투자자의 의사결정이 현재의 소유구조를 형성한 것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경우 사업의 모태(母胎) 또는 주체세력이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총수의 지분이 낮아졌지만 사업의 주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사업 주체에 경영권이 귀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의 경우 경영권 행사를 뒷받침하는 지분 과다(寡多)에 대한 시비가 없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지분은 11%이나, 제이콥스의 퀄컴 지분은 3%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경영성과’다.
계열사 지분은 늘 시비의 대상이 돼 왔다. 총수가 계열사간 출자를 통해 가공자본을 만들어 지배권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지배권 확대는 뒤집어 보면 경영권 방어로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 진력(盡力)하는 것은 당연하다. 스웨덴 핀란드 독일 등 유럽에서는 경영권 안정과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차등 의결권 주식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미국 포드사 대주주도 보유지분의 10배가 넘는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 지배주주의 차등 의결권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계열사간의 출자는 자구책일 수도 있다.
의결권 승수 확대가 총수의 전횡과 수익성 악화의 진원지라는 공정위의 정책 판단은 예단에 가깝다. 공정위의 논리대로라면 피라미드식 소유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집단 중에서도 생존과 도산이 엇갈리는 이유와 의결권 승수가 높은 대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이 높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경쟁력을 지배구조 관련 지표로 압축할 수는 없다. 지배구조와 관련된 우리 대기업의 본질적인 문제는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개연성이다. 이는 이해관계자간의 문제로 증권집단소송제로 풀 일이다. 집단소송제는 ‘주주자본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이미 그 도입이 예정돼 있다.
지배 구조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 있기 때문에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범 지배구조를 설계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이상향을 지향하는 니르바나(nirvana)적 정책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총수 견제와 지배구조 개선은 등가(等價) 개념이 아니다. 의결권 승수 이전에, 변칙과 반칙을 일삼는 기업을 솎아낼 수 있는 시장규율의 작동이 중요하다. 또 시장의 처벌기능은 시장이 정치에 의해 오염되지 않을 때 비로소 작동된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