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 `스캔들-남녀상열지사`에 이어 `인어공주`에 출연하는 전도연. 그는 국내 영화에서는 드물게 1인2역을 맡았다. 사진제공 유니코리아
배우들의 꿈은 기억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를 통해 그들은 또 다른 인생과 생명력을 얻는다.
‘접속’(1997년), ‘약속’(98년), ‘내 마음의 풍금’ ‘해피 엔드’(이상 99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년), ‘피도 눈물도 없이’(2002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년). 최근의 흥행작이나 화제작을 통해 한결같이 만나는 사람이 바로 전도연(31)이다.
지난달 30일 제주 북제주군 우도(牛島)에서 영화 ‘인어공주’를 촬영중인 그를 만났다. 관객들이 ‘스캔들…’과 접속하고 있는 사이 그는 어느새 ‘인어공주’에 푹 빠져 있었다.
○“벌써 31세… 주름살도 보여줄래요”
‘짱구 이마’가 콤플렉스였던 한 탤런트가 ‘접속’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누구도 오늘의 그를 떠올리지 못했다. 2001년 연세대의 한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 ‘한국인 20대 여성 얼굴의 수치 및 감성구조 분석’에 따르면 선이 부드럽고 동그란 그의 얼굴은 연예인 가운데 가장 평균적인 한국인의 얼굴로 나타났다. 미인도 아니고 배우치고는 평범한 축에 속하는 이 얼굴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관객들의 기억을 사로잡고 있다.
감성적인 홈쇼핑 텔레마케터 수현(접속)은 사랑을 찾아가는 의사 희주(약속)가 됐다. 그런가 하면 새빨간 볼이 사랑스러운 17세 늦깍이 초등학생 홍연(내 마음의 풍금)은 어느새 은행원을 짝사랑하는 여린 심성의 보습학원 강사 원주(나도 아내가…), 불륜의 쾌락에 몸을 맡기는 보라(해피 엔드)로 거듭 변신했다. 그 보라가 다시 껌을 질근질근 씹는 3류 깡패 수연(피도 눈물도…)에 이어 마침내 희대의 바람둥이에 정절을 바치는 숙부인(스캔들…)이 됐다.
그 변신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마지막 작품이에요.”(전도연)
“예?”(기자)
“(은퇴작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번 작품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다음 작품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이제 서른하나예요. 20대 초반 때와 달리 얼굴과 체력에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난 억지로 ‘스무 살이에요’라는 식으로 과장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주름살도 보여주면서 잘 봐주길 바라는 거죠.”(전도연)
'인어공주'에서 전도연이 맡은 어머니 역(위)과 딸 역.
○ ‘해녀와 딸’ 1인2역 20년 오가며 연기
대스타보다는 진정한 연기자로 남고 싶다는 그의 욕심은 촬영 현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우도 하고수동 선착장 앞바다. 그는 해녀 연순과 우체국에서 일하는 그의 딸 나영 등 1인2역을 맡았다. 이날 촬영은 연순이 물질(해녀가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따는 일)하다 숨비소리(숨을 고르며 동료들과 신호하는 휘파람)를 내는 장면. 이날 수온은 섭씨 18도였지만 차가운 바람이 매서웠다.
“인어공주 죽네.”
누군가 물질하는 장면을 찍다 뭍으로 나와 뜨거운 물이 담긴 대형 물통 속에 들어가 있는 그를 보며 장난기 섞인 말을 던졌다. 담요까지 뒤집어쓴 채 새파랗게 질려 고개만 내민 그는 “70대 할머니도 한 겨울에 물질한다”며 “영화에서는 내가 상군(물질을 가장 잘하는 해녀)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아직 똥군(초보 해녀)이어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6일 촬영을 시작한 ‘인어공주’는 나영이 20년 전 엄마 연순의 세계로 들어가 엄마의 첫사랑에 끼어든다는 내용의 판타지 멜로. ‘국화꽃 향기’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이 과거 엄마가 사랑하는 우편배달부 진국 역을 맡았다.
‘나도 아내가…’를 연출하기도 했던 박흥식 감독은 “전도연과 박해일이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출연하겠다고 승낙했다”고 밝혔다. ‘인어공주’는 연기 욕심 많기로 소문난 전도연을 유혹하기에 절묘한 ‘미끼’였던 셈이다.
“국내 영화에서 제대로 된 1인2역 연기가 없어 마음이 끌렸어요. 시나리오를 고를 때 내가 공감할 수 있고 연기할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요.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1인2역 등 할 일이 너무 많아 겁이 덜컥 나면서도 안할 수 없더라구요.”
자신과 ‘통(通)하였느냐’야말로 그가 작품을 고르는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작품들의 시대가 바뀌고 배역의 차이가 있을 뿐 내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연기와 마음은 언제나 같습니다.”
어쩐지 동화 속 인어공주와 배우 전도연은 닮았다. 마음이 통하면 누가 뭐래도 사랑이나 작품을 선택하는 그 용기가 비슷하다.
우도(제주)=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