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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고기정/모두 투기꾼일까

입력 | 2003-11-05 18:36:00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10·29 주택시장 안정대책’에서 집값 폭등의 책임을 ‘투기세력’에게 돌렸다.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들이 농간을 부린다는 것이다.

당연히 대책도 투기세력 색출에 집중됐다. 광범위한 세무조사와 함께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보유세와 양도소득세 중과(重課), 임대사업자 등록요건 강화, 주택거래신고제 도입 등의 대책이 쏟아졌다. 집값 폭등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정부도 ‘반(反)시장적’이라고 인정한 대책을 되레 환영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하지만 통제 불능의 상태로까지 치달은 주택시장이 과연 정부의 주장대로 투기꾼들이 만들어낸 결과일까. 더욱이 집을 두 채 이상 갖고 있으며, 그것도 서울 강남권에 집이 있다면 모두 투기꾼일까.

정부는 불과 4년여 전인 1999년 2월 아파트 분양권 전매 제한을 폐지했다. 그해 4월에는 재당첨 제한기간과 무주택가구주 우선분양 제도도 폐지했다. 11월에는 각종 세제(稅制) 혜택을 주는 주택임대사업자 등록요건을 종전 ‘5가구 이상’에서 ‘2가구 이상’으로 완화했다. 모두 부동산경기를 부추기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쯤 되면 집값이 안 뛰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도 지금 모든 책임은 국민이 져야 한다. 그것도 개념조차 모호한 투기 세력으로 매도당하면서 지금보다 수십 배 높은 보유세를 아무 말 못하고 물어야 할 처지다.

더구나 정부의 약속을 믿고 주택임대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은 5채 이상 집을 사서 보유세 중과 대상에서 제외되든지, 아니면 집을 팔아 1가구 1주택자가 되어야 한다. 이 같은 사람들은 8만명에 이른다.

정부도 할 말은 있다. 외환위기 직후 건설업체가 줄도산하는 상황에서 주택시장 부양책은 필수적이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상황논리’를 이해하더라도 정부의 원칙 없는 ‘널뛰기 대책’은 결국 국민의 피해로 돌아왔다. 집값은 집값대로 뛰고, 세금은 세금대로 올랐다. 그나마 정부는 주택시장을 이렇게 만든 데 대한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주택을 ‘소유’의 대상이 아닌 ‘주거’의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원칙도 실종된 지 오래다.

정부의 이번 대책이 일정한 평가를 받는 것은 집값 급등에 대한 사회적 공분(公憤)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분노에는 정책 실패에 대한 실망과 경고가 깔려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조령모개(朝令暮改)식 정책이 선의의 피해자까지 양산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 긴 안목의 ‘주택 정책’이 정말 아쉽다.

고기정 경제부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