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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조광현/공학자와 생물학자의 만남

입력 | 2003-11-07 18:23:00


공학자도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을까. 흔히 공학은 순수자연과학과는 거리가 먼 응용과학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21세기 과학에서 공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는 이미 사라지고 있다.

최근 각광받기 시작한 시스템생물학(sys-tems biology)은 생명과학과 공학이 융합된 새로운 학문분야다. 이 학문은 생명체에 내재된 동적 특성(dynamics)을 시스템 차원에서 규명함으로써 보다 근원적으로 생체기능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적 특성’은 공학의 시스템이론에서 나온 용어다.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이 개별 요소들의 특정 기능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로 발현될 때 그 복잡한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용어다. 제어공학은 이를 바탕으로 대상 시스템의 동작을 인위적으로 조작(제어)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로켓을 우주공간에 쏘아 올리고 초음속여객기가 대륙을 횡단하며 로봇이 일상생활에 비서로 출현하게 된 것 등이 제어공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시스템생물학’ 새로운 가능성 ▼

시스템생물학은 이런 제어공학을 현대 생명과학에 접목시켜 생명현상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새로운 시도다. 우리는 최근 인간게놈 지도의 완성과 더불어 어떠한 질병과 관련된 특정 유전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종종 접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유전자의 발견이 관련 질병의 정복으로 이어졌다는 소식은 없다. 이는 생명현상이 유전자 및 단백질의 특정 기능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생물학은 바로 그런 생명체 구성요소들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연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생명현상을 제어하려는 포스트 게놈시대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시스템생물학은 실험생물학자가 실험계획 단계에서부터 시스템과학자와 의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비춰볼 때 국내에서 그런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기엔 학제간의 벽이 여전히 두껍다.

물론 국내에서도 최근 다학제간 융합연구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융합연구의 방향을 표방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독립된 각자의 연구를 지향해서는 결코 원래의 목표에 근접할 수 없다. 특히 시스템생물학의 경우 생명과학, 시스템과학, 정보과학의 연구가 혼연일체가 돼야 한다. ‘물리적 결합’뿐만 아니라 ‘화학적 결합’이 필요한 것이다.

▼학제간 화학적 결합 서둘러야 ▼

필자는 최근 몇 년간 시스템 차원에서 암세포의 발생 메커니즘을 연구해 왔다. 암은 ‘사멸하라’는 신호전달이 ‘증식하라‘는 신호로 잘못 해석되어 세포가 끊임없이 자기증식을 하면서 발생한다. 이때 이러한 잘못된 신호전달을 차단할 수 있는 새로운 매개체도 발견됐다. 필자는 그 매개체가 작용할 때 생길 수 있는 예상 밖의 성질들을 시스템 차원에서 밝혀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세포 내의 관련 신호전달 경로에 대한 실험데이터가 필요했다. 2년간 대학, 연구소, 학회를 찾아다녀도 국내에서는 공동연구를 진행할 생물학자를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영국까지 건너가 글래스고 암연구소로부터 이를 제공받았다. 1년여의 공동연구결과 실험생물학자가 예견하지 못한 불규칙한 동적 특성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 연구결과는 암치료제 개발의 중요한 단서를 마련해 신약개발로 이어질 전망이다.

융합연구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전 세계 과학계는 이를 빠르게 극복해가고 있다. 현재 유럽 미국 일본 등이 중심이 돼 국가 주도의 시스템생물학 관련 프로젝트가 앞 다퉈 진행되고 있으며 독자적 연구소와 대학이 설립되고 수많은 연구그룹이 형성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공학자와 생명과학자가 나란히 노벨상 시상대에 서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1년여 만에 귀국한 한국에서는 시스템생물학의 공동연구를 시도하려는 국내 생물학자를 찾기가 여전히 어렵다. 좀더 열린 마음을 지닌 한국의 과학자들을 만나고 싶다. 아울러 이러한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정부의 혜안도 기대해 본다.

조광현 울산대 교수·전기전자정보시스템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