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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마지막 野人’들 한자리에

입력 | 2003-11-07 18:23:00

왕년의 주먹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두한의 평생지기였던 김동회, ‘낙화유수’ 김태련, ‘구로아시’ 이영조씨(왼쪽부터).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나이지만 이들은 아직도 협객임을 자부한다. -박영대기자


인생은 낙화유수(落花流水)…떨어지는 꽃잎, 흐르는 물. 세월의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이젠 백발이 성성한 나이. 그래도 다들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우리 시대 ‘마지막 야인(野人)’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검정의 대형 연회장 하림각.

이날은 ‘낙화유수’로 더 잘 알려진 옛 동대문사단의 돌격대장 김태련(金泰鍊)씨 고희연이 열린 날. 김두한의 종로파를 비롯해 광복 후 이정재의 동대문사단과 장안을 양분했던 이화룡의 명동사단까지 계파를 가리지 않고 왕년의 최고 주먹들이 모두 모였다.

김두한의 평생지기로 아흔을 바라보는 원로인 김동회옹과 ‘당개’ 윤봉선옹, 명동사단의 대부인 ‘신상사’ 신상현씨, 그리고 김두한의 딸 을동씨도 참석했다. 이름만 대면 알 정재계 거물들의 축하 화환,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시라소니’ 이성순 역을 했던 조상구씨, ‘정팔’ 정영기씨의 모습도 보였다. 700석을 예약했지만 전국 각지에서 1000여명이 와 발 디딜 틈이 없었을 정도. 일본 야쿠자계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왔다고 했다.

칠순잔치가 이처럼 성황을 이룬 것은 낙화유수의 명성 때문.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인텔리인 그는 생존해 있는 주먹 중 최고 서열. 이정재의 사돈이자 후계자인 유지광 계보의 좌장으로 50, 60년대를 풍미했다. 낙화유수란 별명은 당시로선 훤칠한 키(1m75)에 수려한 이목구비로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지어진 것. 이때의 낙화유수는 남녀가 그리워하는 정이라는 뜻이었다고.

“우리는 깡패가 아냐. 협객이었지. 법을 어긴 건 사실이야. 하지만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지. 그래도 약한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어.”

낙화유수의 첫마디는 ‘협객론’. 옛날엔 ‘오야붕’끼리 맨주먹으로 겨루는 1 대 1 싸움이면 족했고 패자는 즉석에서 패배를 인정했다. 계보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주먹만으로는 안 됐다. 자신의 호의호식보다는 ‘가족’들을 먼저 걱정해야 했다는 것.

그는 ‘야인시대’가 김두한을 너무 미화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왜곡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이정재는 군사정부의 재판을 받고 죽을 때까지, 유지광은 4·19혁명까지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정재가 휘문고보, 유지광이 단국대 법대를 나온 것도 동대문사단의 자랑. ‘눈물의 곡절’ 차민섭은 매일 맞고 사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유머가 넘쳐 ‘찰리 브라운’으로 불렸으며 임화수와는 친구 사이.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지. 그래도 후회는 없어. 마지막 소원이라면 후배들에게 진정한 협객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떠나고 싶어. 그게 돌아가신 이정재 유지광 회장님과 동대문사단에 진 빚을 갚는 길이겠지.”

2년 전부터 당뇨증세가 있어 전성기 때 100kg까지 나갔던 몸무게가 62kg로 줄었다는 낙화유수. 정의사회실천모임의 고문이자 경호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한 ‘큰 형님’의 눈에 어느새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