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저녁 서울 서초구 양재동 색소폰동호회 지하연습실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회원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왼쪽부터 이선룡 교수, 나종국 교감, 김재인 계장, 주현기 교수, 구종민 ㈜리컴 한방사업부 본부장, 조용한 회장. -변영욱기자
사람들은 누구나 영화 같은 삶을 꿈꾸던 시절이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부드러운 음악 한 소절을 연주하는 모습은 다들 한번쯤은 생각해 봤음직한 꿈이다.
5일 늦은 저녁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지하 1층 음악연습실에서 젊은 시절의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넥타이 차림의 중년신사들을 만났다. 색소폰 연주동호회 ‘색소폰나라 한강’에 소속된 회원들이 바로 그들.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육중한 호흡의 색소폰 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동호회에 가입한 지 1년 됐다는 중화초등학교 나종국 교감은 “연주하는 사람의 숨결 그대로 마음을 전해주는 악기가 바로 색소폰”이라고 자랑했다.
‘한강’은 2001년 그저 색소폰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 등을 통해 하나둘씩 모여 만든 모임. 회장인 조용한씨(41)는 “처음에 연습실도 없이 밤늦게 한강 둔치에 모여 색소폰을 불던 경험에서 모임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임에는 분야는 다르지만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굳힌 중년남성이 많다. 특히 최종준 SK와이번스 야구단장, 이선룡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주현기 신구대 교수, 강서구청 김재인 계장 등도 자주 무대에 오르는 회원이다.
이들 역시 예전엔 보통사람들이 그렇듯 바쁜 사회생활에 치여 취미생활은 엄두도 못 냈다. 이 교수는 “술이나 골프 말고는 적당한 놀이문화가 없는 게 한국 중년남성들의 현실”이라며 “금강환경관리청장 시절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요즘엔 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색소폰을 불려면 복식호흡해야 하기 때문에 단전호흡의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며 “예술적인 충족감에 가족들도 ‘멋쟁이 아빠’라고 좋아하니 정신건강에도 최고”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한강’이 자신들만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모이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한달에 1, 2회씩 지하철 무료공연에 참여해 시민들을 위해 연주하기도 한다. 지난달 18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지하철 4호선 이수역(총신대입구역)에선 태풍 ‘매미’ 수재민 돕기를 위한 기금마련 공연도 가졌다.
이들은 한결 같이 “실력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고 겸손해하면서도 무대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곤 했다. 가족 앞에서도 연주하느냐는 질문엔 “쑥스럽다”며 겸연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16일 지하철 2호선 잠실역에 가면 열정 하나만은 세계 최고인 멋있는 중년신사들을 또다시 만나볼 수 있다.
정양환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