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1월 12일 방한한 닉슨 당시 미국 부통령(왼쪽)은 방한 기간 내내 한미 양국의 혈맹관계를 강조했다. 사진은 11월 15일 닉슨 부통령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한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닉슨 美 副大統領 着韓▼
닉슨氏는 이날 飛行機에서 着韓 第一聲으로 “世界에서 가장 重要한 곳에 온 것을 기꺼워한다”고 그의 소감을 要旨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여기 와서 매우 기껍다. 여기는 나의 世界旅行 旅程에서 折半地點인데 또 가장 높은 地點이다. 韓國은 美國에 있어서도 가장 重要한 地點일 뿐 아니라 또 世界에 있어서도 가장 重要한 地點이다. 그것은 美國의 많은 靑年들이 共通된 大義名分과 目標를 爲하여 싸우고 戰死하였으며 또 侵略이 여기서 저지된 것이다. 韓國은 그 自身의 努力과 희생으로 미국의 敬意를 획득하였다. 미국에 돌아온 軍人들도 韓國軍의 勇敢性을 讚揚하고 있는데 共通된 大義名分 밑에서 싸운 이들 靑年들에게 우리는 깊은 感謝를 빚(負債)지고 있다.”
▼닉슨 방한 수만명 환호…지금 온다면?▼
리처드 닉슨(1913∼1994) 미국 부통령의 1953년 방한 장면은 당시 한미관계의 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방한 기간 내내 ‘한미 혈맹’을 강조했다. 방한 이틀째인 11월 13일 환영대회에서는 “한미 양국은 정신과 육신이 일체”라고도 했다. 중앙청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만명의 군중은 이에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고 당시 기사들이 전한다.
30만여명의 미군이 참전했던 6·25전쟁 종전 직후라는 시점을 감안하면 닉슨의 찬사도, 군중의 환호도 결코 의례적인 것일 수 없었다.
닉슨은 68년 마침내 집권에 성공하지만 74년 8월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두 번째 대통령 임기 도중 하차한 ‘역사적 치욕‘의 당사자. 그러나 그의 재임 중에는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책 결정이 많았다. 그는 71년 6·25전쟁 이후 6만∼7만명 규모를 유지하던 주한미군을 4만여명 수준으로 줄였고 73년 1월엔 베트남전 패배를 인정하고 미군을 철수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도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혈맹’으로 시작한 한미관계도 반세기가 지나며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동맹관계 재확인’ ‘이라크 추가파병 결정’ 등으로 볼 때 정부 차원의 한미관계는 여전하다 하더라도 ‘닉슨 부통령 환영대회’의 군중 규모를 넘어서는 학생 시민들이 서울시내 한복판에 모여 ‘반미’ ‘미군 철수’를 외치기도 하는 게 요즘 풍경이고 보면 역시 시간의 흐름 앞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