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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관료사회-외교통상부

입력 | 2003-11-09 19:32:00

외무공무원들의 ‘인사 정거장’ 역할을 하던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 자리가 사라지면서 외교통상부의 인사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2000년 6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린 이 세미나처럼 외교정책에 대한 연구를 통해 외교부를 지원하는 것이 외교안보연구원의 본래 역할이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과거 외교통상부에는 외교정책 결정라인의 고위직을 동일한 고시 기수끼리 돌아가며 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정빈(李廷彬) 전 외교부 장관이나 김태지(金太智) 전 주일대사의 경우 재외공관장을 5차례 이상 지내 ‘직업이 공관장’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8월 인사에서는 공보관 북미국장 아태국장 등 세 자리를 놓고 60여명이 지원(복수지원)했을 정도로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4월에도 국장급 8개 자리의 인사에서 87명이 경쟁했다. 동일한 국장 자리를 동일 기수들끼리 사이좋게 한번씩 돌아가며 누렸다는 과거의 ‘관행’은 이제 생각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는 외무고시 12기(1978년 입부)부터 14기까지의 ‘대량 선발시대’의 외교관들이 올해부터 국장급 인사에 지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20명 내외에 불과했던 과거 기수와 달리 이들 기수는 각기 50여명씩 입부했고 지금도 기수당 40여명씩 남아 있다. 이들은 초임시절부터 같은 기수끼리 보직경쟁을 해 왔다는 점에서 외교부 내에서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윤영관(尹永寬) 장관이 취임 초기 국장의 임기를 2년간 보장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경쟁을 과열시킨 한 요인이다. 일단 국장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보임되면 2년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너나할 것 없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인사경쟁에 뛰어드는 것이다. 선배들이 국장을 끝내야 다음 기수가 지원하던 ‘미덕’도 사라졌다.

이런 자리경쟁은 내년 7월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신외무공무원 인사제도와 맞물려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신인사제도는 이사관 부이사관 등의 직급을 완전히 없애는 대신 북미국장 아태국장 등 직책을 받을 때 14개로 세분한 급여 등급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새 제도에 따르면 보직희망자들의 인사평점, 해당분야 경력, 어학 등을 종합평가해 적임자를 선정한다. 해당보직의 업무량과 조직공헌도 등에 따라 ‘직무값(위에 언급한 14개 급여등급)’이 매겨지며 이에 따라 직책마다 급여가 차등 지급된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직급에 따라 보직을 주는 고정관념을 깨고 그 자리에 적합한 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 전문성을 살리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이래야 워싱턴스쿨이나 저팬스쿨 등 특정인맥에 들어갔느냐의 여부에 따라 출세가 좌우되곤 하던 종전의 폐해를 해소하는 효과도 기대된다는 것.

외교부 내에서는 다른 부처와 달리 직급을 모두 없애고 직책만 따지는 이런 인사시스템이 특정보직을 둘러싼 무한경쟁을 야기하는 등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보직 차별이 있었을지 몰라도 일정 연한이 되면 대체로 직급 승진은 보장됐던 그동안의 인사풍토에 익숙해 있는 외교부 직원들로서는 ‘능력과 경쟁’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내심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는 것.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들어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외교부 산하 조직인 외교안보연구원을 다른 부처 산하 연구원처럼 독자 조직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함에 따라 그동안 외교부 본부와 재외공관 근무기간 사이의 정거장 기능을 해 온 외교안보연구원의 위상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독자조직화는 일단 유예됐지만 외교부는 위원회의 지적을 일부 수용해 그동안 외교부 본부 심의관을 외교안보연구원 소속 연구관(18개 자리)으로 발령 내 활용하던 관행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현재 외교부 본부 내 심의관과 본부대사 40여명이 무보직 상태에서 불안감을 안고 있다.

최장 65세(특1급, 특2급 대사 등)까지였던 외교관 정년이 최근 60세로 낮아졌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해외공관장을 지낸 뒤 본부에 들어와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적절한 보직을 받지 못할 경우 대기명령 퇴직을 당할 수도 있게 됐다. 한 외교부 관계자는 “일본 외무성은 고시 동기생이 대사로 나갈 때 과장 보직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데 이젠 우리도 마찬가지 상황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정된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일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거꾸로 좋은 자리에 가기 위해 경쟁하기보다 여유 있는 자리를 찾아 삶을 즐기자는 분위기도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